[정신의학신문 :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 

 

사연)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주 간략히만 설명하자면 어릴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바로 엄마와 같이 살던 남자에게 10대 동안 매일같이 학대와 폭언과 성추행을 당했습니다. 한 번은 하도 맞아서 일주일 동안 못 일어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떠난 뒤 고등학생 때부터 학교 다니면서 알바를 하기 시작했고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습니다. 그즈음부터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셨고 제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돈만 벌어가면서 살았습니다. 밑에 동생들이 있었지만 사지 멀쩡해서 정신은 썩은 상태로 일하지 않고 먹고 게임만 하고 잠만 자는 게 꼴 보기 싫어 내쫓았습니다. 그 뒤로 엄마와 단둘이 오로지 무식하게 일만 하고 쉬지도 놀지도 않고 살았고 그러면서 사람들 친구들도 많았지만 할 수 있는 건 일 끝나고 소주 한잔하는 게 다였고 일만 하고 술만 마시고 그게 제 일상이다가 어느 날 사고와 사건들에 휘말리면서 친구들과 사람들의 진심들이 다 가짜라는 걸 보게 된 후 모든 인간관계를 다 끊어냈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사건들과 불운한 가정환경들이 있었던 저지만 그럼에도 저는 당당했고 꿋꿋했고 남자보다도 멘탈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제가 한 남자를 만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10년 전에 만나 2년 사귀고 헤어졌다가 몇 년 전에 재회해서 3년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감정이 끊어지지 않은 채 헤어졌고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니 좀 더 성숙하고 멋진 연애가 될 거라 생각하고 다시 만났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집만 더 생겼고 제 말은 무시하고 귀담아듣지 않으면서 본인 말은 다 들어주길 바라기만 합니다. 뭐든지 본인 위주로 생각하고 제가 아픈지 불편한지 살펴보지 않고 무조건 성질만 내고 화만 냅니다. 쉬는 날은 만나서 여행도 다녀보고 같이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저는 만나고 올 때마다 마음도 몸도 다쳐서 돌아옵니다.

매번 부딪히고 싸우기만 하는데 사실 지칩니다. 둘 다 좋아하는 마음은 있는데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항상 제게 모든 책임을 전가합니다. 매번 제가 성격이 이상해서 상황을 나쁘게 만든다고 합니다. 다 저의 이상한 성격 탓이라고 합니다. 너무 답답하고 숨 막힙니다. 힘든 세상 만나서 서로 좋아야 하는데 이건 매일이 지옥이고 고통입니다. 자살 생각이 수시로 납니다. 불면증에 며칠 전에는 위험하게 수면제를 다량으로 먹고 기절도 했었습니다. 잠도 못 자겠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만 가는데 그 사람은 저만 잘못이라고 합니다. 저의 이상한 성격 자체가 상황을 안 좋게 만든다고 하는데 너무 숨 막힙니다. 그러면서 또 결혼은 하고 싶다고 하고 저는 그 사람 볼 때마다 불편해서 가슴이 뛰는데 믿음도 신뢰도 든든함도 따뜻함도 전혀 없는 이상한 관계 그러면서 사랑한다고 하고 저밖에 없다고 말하고 참 답답하고 미칠 지경입니다.

다시 만난 건 감정이 남아있었고 좀 더 따뜻하고 안정된 관계가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전혀 아닙니다. 날카롭고 뾰족하고 비난만 하고 무시하고 구박하고 그러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거 같습니다. 이러다 제가 진짜 정신병자가 될 것 같아요. 지금도 계속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있습니다. 죽고 싶어요. 너무 그 사람과의 실랑이가 이제 지치고 힘겨워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요. 어떡해야 하나요 치료를 받아야 할까요?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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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사연에서 많은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지금 관계에서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은 어린 시절의 힘들었던 기억들과 어느 정도 닿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커 보입니다.

어린 시절 내가 받아온 학대는 분노나 우울 같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쉽게 변하는 기분을 유발하기도 하고요. 겉으로 문제가 드러나지 않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잠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일하면서 꿋꿋하게 지내왔더라도 내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이러한 감정들이 터져 나올 수 있겠습니다.

학대와 관련된 관계의 문제는 대개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안정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불안과 불신만 가져다주게 되고, 관계를 끊어내거나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고 안정적으로 기댈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을 만드는 게 어려워지고 감정적인 문제가 더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애인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모습은 심한 수준의 우울과 불안감입니다. 관계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고민을 해볼 문제입니다. 학대와 관련된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나를 존중하지 않거나, 감정조절이 되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릴 때 내가 당했던 학대를 반복하게 할 만한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인데, 이를 프로이트는 반복 강박이라고 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내가 어릴 때 맺은 익숙한 관계를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경우로는 내가 학대자가 되어 학대자와 피학대자의 관계를 반복하는 양상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왜곡하고, 자꾸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상처를 입히는 등의 행동을 반복하며 진실된 관계를 어지럽히는 일을 반복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잠들어있는 분노가 파괴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면서 상대방을 괴롭히고, 상대방이 화를 내게 되면서 내가 두려워하는 학대의 관계가 다시 반복되게 됩니다.

사연만으로 사연을 주신 분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전부다 파악하긴 어렵지만, 약물을 사용한 자살시도나 여러 가지 신체 반응들, 감정적인 어려움은 상황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어떤 것보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입니다. 최소한 약물치료와 내가 안심할 수 있는 치료자를 통해 안정감을 찾고 증상을 진정시키는 과정이 가장 우선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학대와 관련된 기억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도 치료자는 필요합니다.

 

그리고 관계가 고통을 유발하고 있다면 당분간은 거리를 두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래야 관계에서 보이지 않던 문제들을 내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문제라면 나의 어려움을 먼저 달래고, 관계를 다시 유지하는 게 가능할 것이고 정말 나에게 상처만 주는 관계라면 과감하게 멀어질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위에 다른 안정감을 줄 사람들을 믿어보려고 노력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상처 받은 기억들로 인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믿는 게 힘들더라고 감정적인 부분보다 객관적인 부분을 따져가며 믿을 만한 사람을 믿어보려고 애쓰는 게 필요합니다. 내 주위에 있는 한두 명의 믿을 만한 사람들과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적절한 도움을 통해서 지금의 어려움을 잘 이겨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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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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