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16)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알코올 의존증, 즉 알코올 사용장애는 이혼 등으로 가정이 풍비박산 나고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은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적절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고립된 사람을 가리키는 사회 부적응자인 셈이죠.

그런데 음주 문제, 즉 술 때문에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 상담하는 이들 중에는 이런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멀쩡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좋은 직장을 다니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분들입니다. 너무도 사회에 잘 적응하면서 남들의 부러움까지 사는 이런 사람들이 왜 술 때문에 고민하는 걸까요?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애를 써도 통 잠이 오지 않아요.”

“오늘은 마시지 말아야지 다짐하지만, 퇴근 시간만 되면 한잔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들이 털어놓는 고충은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를 술로 풀다 보니 매일 술을 마시는 게 습관처럼 된 것이죠. 젊은 여성 중에도 이런 분들이 꽤 있습니다. 

이렇게 마시다 보면 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술이 없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나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알코올 사용장애는 특별한 사람만 걸리는 질환이 아닙니다. 과도한 음주로 인해 정신적, 신체적, 사회적 기능에 장애가 생기는 질환이 알코올 사용장애입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는 현대인들, 특히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다이내믹한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알코올 사용장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예전부터 음주에 관대한 술 권하는 사회인 까닭에 이런 우려는 결코 기우가 아닙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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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기막히게 잘 표현한 시가 있습니다. 한 번 읽으면 재미있어 웃음이 나지만, 거듭해서 읽다 보면 웬일인지 가슴이 아리고 슬퍼지는 시이기도 합니다.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새해를 앞두고 많은 사람이 금주를 결심합니다. 당연히 얼마 못 가서 결심은 무너집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혹은 심경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금주를 선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시로 술을 끊겠다고 선언하거나 결심한다는 것은 그때마다 실패한다는 말이겠죠.

시인 역시 그랬습니다. 이제부터 술을 끊으리라 결심했습니다. 그러고 호기롭게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앞에 감자탕집이 나타났습니다. 호객용 광고 문구가 선명합니다.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로 드립니다.”

식당 주인의 방점은 감자탕에 찍혀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는 소주 한 병 공짜라는 글자만 보입니다. 소주 한 병 공짜라는 말에 꽂힌 거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으려 했는데, 굳은 다짐은 한 줄 광고 문구 앞에서 처참하게 허물어집니다. 내 돈 내고 사서 마시지는 않겠으나 공짜로 준다는 데야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표정을 감추려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비가 오려나 날이 꾸물거리네요. 아, 술 마시기 진짜 좋은 날입니다. 고소한 골뱅이무침에 소주 한잔 또는 노릇노릇한 해물파전에 막걸리 한잔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날씨입니다. 감자탕집에 이어 날씨까지 금주를 결심한 자신을 비웃는 것 같습니다. 왜 하필이면 오늘 금주를 선언했는지, 정말 후회막급입니다.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마음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금주 결심은 가뭇해진 지 오래입니다. 술 마실 구실을 찾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술을 끊음으로써 벌어질 일들이 마구 떠오릅니다. 허물없이 만나던 술친구들도 하나둘 떠나갈 테고, 진솔하게 속내를 털어놓거나 거리낌 없이 미운 놈 뒷담화를 늘어놓던 자리도 없어질 테고, 속이 헛헛하거나 기분이 답답할 때 이를 풀거나 달랠 수단도 사라질 겁니다. 인간관계는 급격히 단절되고 사는 맛 자체가 없어지겠죠. 무슨 재미로 살아갈지 생각만 해도 막막합니다. 왜, 누구를 위해 금주를 한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시인은 스스로 피해자인 것처럼 항변합니다.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시인은 감자탕집 광고 문구를 보는 순간 직감했습니다. 자신의 금주 결심이 소낙비에 잔불 꺼지듯 사그라져 버릴 거라는 것을. 자신의 결심이라는 게 워낙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거라는 것을. 불혹의 뚝심은 무겁지 않았습니다. 아마 감자탕집 주인은 알았을 겁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죠. 날 훤히 꿰뚫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보여줘야죠. 무너지는 모습을 말입니다. 시인은 결심합니다. 호락호락 무너지기로. 그는 홀가분하게 감자탕집을 향해 들어갑니다. 소주 한 병 공짜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 이 장면은 해피엔딩일까요? 아니면 새드엔딩일까요? 굳은 결심이 허무하게 무너졌지만, 시인은 슬프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꿰뚫고 유혹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무너지며 나의 얕고 얕음으로 세상에 대항하려는 것입니다. 호락호락하게 보이지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시인만의 뚝심입니다.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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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술 마시는 풍속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 술을 마실 수 없게 되면서 혼자서 술을 마시는 ‘혼술’과 집에서 술을 마시는 ‘홈술’이 늘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음주량이 증가했습니다. 누가 그만 마시라고 말리는 사람도 없고, 영업시간에 제한도 없어 매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잠들거나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사람이 생겨난 겁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틈틈이 영화 채널을 돌리거나 유튜브를 보면서 홀짝홀짝 술을 마시다 보면 언제 이렇게 많이 마셨는지도 모르게 술병이 쌓여갑니다. 우리나라만큼 야식과 배달 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없으니 언제든 주문만 하면 다양한 안주들이 집으로 배달됩니다. 술 권하는 사회에 살던 조상들조차 요즘 세대를 부러워할 정도로 술 마시기 참 좋은 세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매일 같이 술을 마시는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알코올에 의존하게 됩니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중독성을 갖게 되는 것이죠. 어쩌다 한번 많이 마시는 사람보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마시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직장이나 동문회, 산악회 등 각종 모임에서 폭탄주를 돌리면서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는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음주 문화가 줄어든 것은 긍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지만, 혼술족과 홈술족이 늘어나면서 술을 마시는 횟수가 증가하고 자주 마시지 않던 사람들까지 일상적으로 술을 마시는 사례가 많아지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임희구 시인이 ‘소주 한 병이 공짜’라는 시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뭘까요? 날 좀 그냥 내버려 두라는 외침 아니었을까요? 마음먹은 대로, 결심한 대로,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죠. 집 밖에만 나가면 내 마음을 흔들고, 내 결심을 무너뜨리며, 내 의지를 여지없이 허무는 유혹들이 즐비합니다. 공짜가 아닌데도 공짜라고 속이고, 좋지 않은 것인데도 좋은 거라고 호립니다. 모질게 살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가 넘쳐납니다. 세상은 나를 훤히 꿰뚫고 있어서 얕고 얕은 내가 금방 무너질 걸 압니다. 그래서 더 약 오르고 화가 납니다. 호락호락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번 나는 호락호락 넘어가고 맙니다. 이렇듯 삶은 늘 난감하기만 합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매사 호락호락하지 않으려 애써야 합니다. 술은 항상 우울과 황홀 사이에서 헤매게 만듭니다. 잘 마시면 약이고 잘못 마시면 독이죠.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에게 술은 정다운 친구가 될 수 있지만, 호락호락한 사람에게 술은 무서운 강도일뿐입니다. 

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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