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13)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불면증에 시달릴 때 – 잠들지 못하는 이 세상 온갖 생명에게
: 이원규의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잠은 도대체 뭘까요? 하루 여덟 시간 자는 사람은 인생의 3분의 1을 자는 데 쓰는 셈이고, 하루 여섯 시간 자는 사람은 인생의 4분의 1을 자는 데 쓰는 셈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 아까운 시간입니다. 중고등학생 시절 ‘4당 5락’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하루 네 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자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잠을 많이 자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하는 사람이 그만큼 보상을 받고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잠은 눈이 감긴 채 의식 활동이 쉬는 상태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잠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잠은 자는 동안 열심히 일했던 신체 활동이 중지됨으로써 피로를 해소하게 됩니다. 뇌 속에 쌓인 노폐물도 제거하게 되죠. 미국 학자들이 수면 상태인 쥐의 뇌를 연구했더니 잠자는 동안 뇌세포 사이의 공간이 넓어지고 뇌 안에 쌓인 독소가 제거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활발히 움직였던 낮 시간 동안에 경험한 일들과 감정 등 외부에서 입력된 정보를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일상에서 겪은 일 중에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분류해 저장하거나 지워버리는 과정입니다. 자는 동안 꾸는 꿈을 통해 욕구를 해소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는군요. 현실 세계에서 가상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이처럼 잠의 기능은 방대하고 유용합니다. 쓸데없이 허비하는 시간도 아니고,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죽은 시간도 아닙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더 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충전의 시간인 것이죠. 그래서 잠은 제때 푹 자는 게 제일 좋습니다. 숙면이 곧 보약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거나, 충분히 잤는데도 낮에 각성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수면 리듬이 흐트러져 잠자거나 깨어 있을 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증상을 전부 포괄하는 질병이 바로 수면장애(Sleep Disorder)입니다. 불면증(Insomnia)은 그중 하나죠. 잠이 들기 어렵고, 자다가 자주 깨며, 너무 일찍 잠을 깨고, 충분히 잤는데도 계속 졸린 경우를 모두 불면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 환자들의 80% 정도가 수면장애를 호소합니다. 우울증 환자의 경우 잠드는 게 어려우며, 잠들었다 해도 금방 깨곤 합니다. 조증, 불안장애, 강박 신경증이 있을 때도 불면증이 찾아옵니다.
불면증이 있는 시인은 밤을 어떻게 보낼까요? 밤새 시를 쓸까요? 술을 마실까요? 아니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까요? 먼저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라는 시를 한 편 감상해 보시죠.
아직은 저혈압의 풀잎들
고로쇠나무 저도 관절이 쑤신다
별자리들도 밤새 뒤척이며 마른기침을 하고
길바닥에 얼굴 처박은 돌들도 소쩍새처럼 딸꾹질 한다
그대 아주 가까이
530리 섬진강 유장하게 흐르다
굽이굽이 저 홀로 모서리치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
고사목들도 으라차차 달빛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서러워 서럽다고 파르르 떨지 말아라
외로워 외롭다고 너무 오래 짓무르지 말아라
섬이 섬인 것은 끝끝내 섬이기 때문
여수 백야리 등대도 잠들지 못해 등대가 되었다
이원규 시인이 2019년에 펴낸 시사진집의 표제작입니다. 시인은 20년 넘게 지리산에 살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사진을 찍고 시를 쓰는 자유로운 인생이죠. 그는 시는 가슴이나 머리 또는 펜으로 쓰는 게 아니라 발로 쓰는 것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리산을 비롯한 한반도 전역을 누비고 다니며 곳곳에 자생하는 야생화와 토종 나무들 위로 떠오르는 별을 사진으로 담아왔습니다. 밤마다 홀로 별천지를 찾아 헤맨 겁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사방이 깜깜합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이름 모를 별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잠을 잘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봅니다. 잠들지 못하는 게 나 혼자만이 아닙니다. 다들 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수한 풀잎은 저혈압이라 잠을 자지 못하고 이리저리 제 몸을 뒤척입니다. 고로쇠나무 역시 관절이 쑤셔서 통증을 호소하며 잠 못 이룹니다. 초봄에 줄기에서 채취하는 고로쇠나무 수액은 당뇨, 위장병, 신경통, 신장병 등에 좋다고 알려져 있고, 가을에 채취하는 뿌리와 줄기의 껍질은 위장병, 폐병, 관절염에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로쇠나무가 정작 자신은 관절이 쑤셔서 잠을 자지 못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별자리들도 밤새 뒤척이며 마른기침을 해댑니다. 길바닥에 얼굴 처박은 돌들도 소쩍새처럼 딸꾹질을 하고요. 잠들지 못하는 온갖 생물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나만 아픈 게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잠든 줄 알았던 섬진강은 밤새도록 바다를 향해 유장하게 흘러갑니다. 평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닙니다. 굽이굽이 흐르다 모서리라도 나오면 세게 부딪힐 수밖에 없지만, 아픔을 참고 견디며 계속 흘러가야 합니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 사는 나무죠. 고사목은 병이나 산불, 노화 등으로 서 있는 상태에서 말라죽은 나무고요. 하지만 주목이나 고사목 모두 달빛 아래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장구한 대자연의 역사와 순리 속에 조금 더 살고 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더 많이 아프고 조금 덜 아픈 게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게 아닙니다. 주목과 고사목이 같이 기지개를 켜는 이유입니다.
졸릴 때 눈꺼풀의 무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무겁습니다. 천근만근이라고도 하죠. 도저히 들어 올릴 재간이 없습니다. 감길 수밖에 없죠. 전국 고속도로와 국도에 졸음쉼터가 설치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반대는 어떨까요? 잠이 오지 않을 때 아무리 눈을 감아도 정신이 말똥말똥합니다. 눈꺼풀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요? 솜털처럼 가벼울 겁니다. 감으나 뜨나 잠이 오지 않으니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의 눈꺼풀은 한없이 가볍지만, 그만큼 힘들고 괴롭기에 무거운 법입니다. 나만 그렇다면 얼마나 서럽고 외로울까요?
시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사연과 고통을 가지고 있기에 쉽사리 잠들지 못한 채 밤마다 신음하고 번민하며 뒤척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서러워할 필요도, 외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산다는 건 아픔을 느끼는 일이고, 견딘다는 건 고통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전남 여수시 백야도에는 100년 가까이 된 등대가 있습니다. 여수 밤바다를 밝히며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등대죠. 등대는 잠들지 못하는 대표적인 존재입니다. 등대가 잠들면 밤바다와 선박들이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등대처럼, 이 세상에는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하는 존재들이 많습니다. 나의 불면으로 다른 존재가 숙면에 들 수 있습니다. 국토 곳곳을 숱하게 누비고 다니며 방랑 시인이 깨달은 불면의 원리가 이렇습니다.
밤에 잠이 잘 안 오나요? 잠 못 이루는 밤이 길어지나요? 시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의 사연과 고통을 가지고 있기에 쉽사리 잠들지 못한 채 밤마다 신음하고 번민하며 뒤척인다고 합니다. 그러니 서러워할 필요도, 외로워할 필요도 없다고 하네요. 잠들지 못하는 게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거죠. 조금 위로가 되셨나요? 세상의 온갖 생물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밤을 지새우듯 밤을 지새우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밤을 견디다 보면 혹시 압니까? 어느새 내가 세상을 환히 비추는 등대가 되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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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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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자신의 글을 통해 작은 생각의 변화를 이끄는
선생님의 노력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