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11)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우울과 조울 – 우울에 지친 그대 어깨 위에
: 정해종의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근심스럽거나 답답하거나 활기가 없는 상태를 우울이라고 합니다. 흔히 “오늘 나 기분이 좀 우울해.”, “지금 나 우울하니까 말 시키지 마.”라고 말하곤 하죠. 우울한 기분은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우울증이란 일시적 기분이 아니라 정신적 기능이 전반적으로 저하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의욕이 없고 기분이 침체됨으로써 감정, 생각, 신체, 행동에 변화가 생겨 삶에 영향을 끼치는 심각한 질환입니다. 이 같은 증상이 거의 매일, 하루 종일 나타나는 경우를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조울은 뭘까요?

조증과 우울증이 교대로 나타나는 증세로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양극성 장애로 분류합니다. 조증(躁症, mania)은 비정상적으로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는 질환입니다. 감정이란 적당해야지 지나치게 많거나 적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즐거움도 마찬가지죠. 별로 유쾌한 일도 없고 오히려 괴로운 나날이 이어지는데, 마냥 웃음이 나오고 의욕이 샘솟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정상이 아닌 겁니다.

조증이 있는 사람은 언젠가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붕 떠올랐다가 갑자기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셈이죠.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감정의 장애를 조울증, 즉 양극성 장애라고 하는 겁니다. 양극성 장애를 앓는 사람은 극단적으로 에너지가 충만해져서 기분이 고조되었다가 일순간 깊은 고통과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변에 우울증 혹은 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답답한 일뿐인데, 누구에게 하소연하거나 위로를 받으려 해도 사람조차 만날 수가 없으니 쌓인 스트레스와 고뇌를 해소할 길이 없습니다. 감정이 비정상으로 치달을 이유들이 차고 넘칩니다.

 

사진_픽셀
사진_픽셀

 

시인들도 우울이나 조울에 빠질까요? 시인들은 이럴 때 어떻게 감정을 다스릴까요?

특이하게 아프리카 미술 전시 기획자로도 활동 중인 정해종 시인이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력만큼이나 시 제목이 독특하죠? 어떤 시인지 감상해 볼까요?
 

내가 마신 술들을 한 순간 토해 낸다면 집 앞에 작은 또랑 하나를 이루리라
그 취기를 풀어 권태로운 211번지 주민들을 알 수 없는 슬픔과 열정으로 몰아가고
나는 빈 소줏병이 되었으면,
혼이 빠져나간 듯 바람에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모아 뭉게구름을 만들면
우울증의 애인을 잠시 즐겁게 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웃는 애인 앞에서 구겨진 담뱃갑이 된다면,


시인은 술을 꽤 좋아하나 봅니다. 하긴 시인 중에 술 싫어하는 시인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평소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기에 그동안 마신 술을 토해 내면 작은 또랑 하나가 된다고 했을까요? 또랑은 매우 좁고 작은 개울을 의미하는 도랑의 사투리입니다. 술은 슬퍼도 마시고 기뻐도 마십니다. 즐거울 때는 즐거워서 한 잔, 괴로울 때는 괴로워서 한 잔입니다. 술은 기쁨을 배가시키고, 슬픔을 반감시킵니다. 그래서 시인은 술을 마십니다.

시인이 자신이 사는 동네를 둘러봤습니다. 사람들이 생활의 고단함에 찌들어 권태롭게 보입니다. 안쓰럽습니다. 시인은 소망합니다. 자신이 소주병이 되어 동네 사람들에게 술 한 잔씩 따라줌으로써 그들이 권태에서 벗어나 슬픔도 맛보고 열정도 느껴볼 수 있기를 말이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권태보다는 감정의 시소에 울렁거릴망정 슬플 때는 슬프고 기쁠 때는 기쁘고 우울할 때는 우울하고 환호할 때는 환호하는 게 사는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애인이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에 걸렸으니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번에는 술 대신 담배를 택합니다. 시인은 담배도 잘 피우나 봅니다. 담배 연기를 모아 멋지게 뭉게구름을 만들 수 있답니다. 그렇게 하면 우울증에 걸린 애인이 근심 걱정을 잊고 환하게 웃을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은 구겨진 담뱃갑이 되어도 좋다고 합니다. 애인의 웃는 얼굴을 위해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워 뭉게구름을 만들어야 하니 힘들고 고단해서 담뱃갑이 되고도 남을 듯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은 소주병이 되든지 담뱃갑이 되든지 다 좋으니 이웃들이 그리고 애인이 정상적인 희로애락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이타적인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읽어 온 책들의 활자를 풀어 벽촌의 싸락눈으로 내리게 하고
만남과 이별의 숱한 사연들을 가랑비로 내리게 한다면,
그리고 속이 텅 빈 가을 벌판의 허수아비가 된다면,
주저하다 보내지 못했던 수많은 편지의 허리 굽은 글씨들을 바로 펴
삼천리 금수강산을 그릴 수 있다면 북어대가리 같은 사유의 흔적만 남더라도
한결 가벼워진 몸을 쉽게 눕힐 수도 있으리라


이타심은 이제 이웃과 애인을 넘어온 천지로 향합니다. 자신이 읽은 책들의 활자를 죄다 풀어 벽촌의 싸락눈으로 내리게 하고, 숱한 만남과 이별의 사연들을 모아 가랑비로 내리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는 속이 텅 빈 가을 벌판의 허수아비가 되더라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시인은 책도 많이 읽고 연애편지도 많이 쓰고 실제로 연애도 많이 했나 봅니다. 주저하다 보내지 못했던 편지들이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그 편지들의 허리 굽은 글씨들을 바로 펴서 삼천리 금수강산을 그릴 수 있다면 자신은 가벼워진 몸을 쉽게 눕힐 수 있을 거랍니다.

학문도 사랑도 눈이 와야 할 때 눈이 오고, 비가 내려야 할 때 비가 내리는 자연의 순리에 비하면 허망하고 가볍기 그지없습니다. 인생의 온갖 풍상과 곡절들 역시 땅에 발 디디고 땀 흘리며 사는 현실의 삶 앞에서는 흔적도 남지 않을 만큼 미미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요.

 

그렇게 누워 썩을 수 있다면,
제 영혼은요 거름이 되고 공기가 되어서 우울에 지친 그대 어깨 위에 잠시 머물고,
잠시 머물며 썩어 거름이 되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썩기 위해
우울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한없이 깊은 어느 곳으로 스며들 것입니다.


시인이 바라본 세상은 온통 우울합니다. 이웃도 우울하고 애인도 우울하고 사방천지가 우울합니다. 그 우울함을 해소하고 치유할 수 있다면 자신은 한없이 가벼워진 몸을 눕혀 그대로 썩어져 거름이 되고 공기가 되어도 좋다고 합니다. 육신을 벗어던진 자신이 훨훨 날아서 우울에 지친 그대 어깨 위에도 머물고, 사방천지를 두루 돌아다니기도 하다가 깊은 어느 곳으로 스며들 거라고 합니다. 우울증에 빠진 애인을 위한 애틋한 마음이 절절히 다가옵니다.

 

우울증과 조울증은 결코 가볍게 생각하거나 넘겨버릴 질환이 아닙니다. 반드시 전문의 상담을 통해 제대로 된 진찰과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울증과 조울증의 경우 환자 본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배려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조증이 찾아오면 자주 짜증을 내거나 공격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수면욕도 줄어들고 과대사고에 빠져들며 자존감이 고양됩니다. 충동적이 되기 쉽고 판단력이 떨어지며 주변 일에 자꾸 주의가 끌립니다. 더 심하면 환각을 경험하거나 망상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에 빠지면 슬픔이 지속되거나 이유 없이 눈물이 납니다. 식욕도 떨어지고 잠도 잘 안 오죠. 화를 내거나 쓸데없는 일로 걱정과 불안을 달고 삽니다. 염세적이 되고 매사 의욕이나 관심이 줄어듭니다. 죄책감과 자책감에 빠져 죽음이나 자살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나 지인 중 이런 사람이 있을 경우, 그가 병에 걸려 그렇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평안한 마음을 회복해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도대체 자꾸 왜 그러는 거야? 정신 좀 차려. 나도 힘들단 말이야.”
“정말 지긋지긋하다. 제발 좀 그만하자,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니?”

이런 식으로 환자를 막 대하거나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나 화를 내면 증세는 더욱 악화됩니다. 환자에게나 자신에게나 가족 모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반응과 행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시는 큰 울림을 줍니다. 우울증에 걸린 애인을 위해 저렇게 해줄 수 있는, 저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1996년에 발표된 시지만, 이 시의 유용성은 요즘 더 절실한 것 같습니다. 저런 애인이 있다면 금방 우울증이 나을 것 같습니다.

 

우울증에 빠졌다 극복한 이야기를 엮은 김현지의 책 『나의 우울에게』에는 우울증에 걸린 자신을 향해 가장 믿었던 부모로부터 당한 비웃음의 아픔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훌쩍이며 여러 종류의 자가 진단 테스트를 했다. 결과들은 앞다투어 우울증이라고 아우성치는 듯했다. 그래도 확신할 수 없어서 계속해서 찾고 또 찾았다. 인정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과대망상일까 봐.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나는 나의 동아줄, 부모님에게 용기 내어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비웃음과 함께 “네가 무슨 우울증이야.”라는 말이었다.”

 

신문 기자인 이주현은 자신의 조울증 체험기인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에서 조울증 치료에 가족과 주변 사람의 도움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여러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병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정신질환은 특히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친밀한 관계가 절실하다. 가족에게 버림받는다면 고통과 상실감 때문에 병이 더 악화될 수 있다. 약물치료를 통해 정상 상태로 돌아온다고 해도, 환자에겐 사회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사회적 관계가 무너져 있다면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 완전히 복구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직장생활, 인간관계, 경제적 질서 등을 다시 세우는 데는 공감과 격려, 객관적인 충고, 경제적 지원을 해줄 가족 같은 가까운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애인이나 가족이 우울증 또는 조울증에 빠졌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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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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