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황인환 여의도 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Q) 안녕하세요. 대학교 4학년 학생입니다.

저는 대학교 생활이 단 한 번도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어요. 현재도 불만족스럽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책이 닳을 만큼 보고, 시험 한 달 전에 준비하는 등 엄청난 노력을 쏟았었어요.

그런데 대학 생활은, 제 이번 학기 석차는 거의 끄트머리입니다.

 

대학생이 되고 이상하게 학과 생활에도 적응을 못하고, 친구도 없이 지냈어요.

2학년 즈음엔 수업만 끝나면 두통에 시달렸는데, 깨질듯한 편두통이 이유 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그냥 넘어갔는데, 3학년이 되고 실습을 시작하면서 스트레스와 증상이 심해지며 문제가 터졌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숨이 가빠지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있는 제 자신에게서 불안감이라는 게 신체 증상으로 나타났었어요.

너무 힘들고, 책도 보기 싫어서 수업이랑 실습만 성실히 하고 수업 때 들은 걸로만 시험 보고 따로 ppt나 책을 보지 않은 채 매번 시험을 보면서 3학년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음해는 휴학하며 사람들 앞에서 나서는 모습도 하고 성격을 다시 밝아지도록 운동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D+받았던 과목을 재수강하면서 공부해서 B+로 상승시키면서 '나도 하면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을 갖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이렇게 올해는 복학하여 한 학기를 다니고 이번에 방학을 했어요.

이번 학기에 친구도 많이 사귀고, 실습도 최선을 다하고, 실습과제인 케이스 스터디도 열심히 해서 교수님에게 칭찬도 받은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원래 학점이 워낙 낮아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항상 자신이 없어요.

'인생에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인생은 성적순 아닌가요?

 

 사진_픽셀

 

공부에 집중도 안 되고,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이제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미 공부를 열심히 해봤지만 동기 부여도 안되고, 재미가 없어요.

성적도 낮은데, 얼굴도 그렇게 예쁘지 않고 뭐 하나 잘난 게 없는데(저에게 있어서 자랑거리는 부모님이 부부 싸움한 적이 없을정도로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 왜 살아야 할까요?

 

삶의 의미가 없어요. 대학 다니면서 저를 잃는 기분이 드는데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할까요?

원하는 학과에 다니는데 이게 진짜 제가 원하는 건지 이제는 의문이 드네요.

집중도 안되고, 하면 할수록 암울해요. 제 인생은 실패한 거 같아요.

 

외적 만족감(공부, 성적)이 충족되지 않으니 내적 만족감을 충족시키려고 그런지 제가 폭식을 가끔 하나 봐요.

그래서 매번 방학 때마다 체중 감량을 하는데 개강만 하면 2달 내에 매번 원상태로 돌아와요.

성적이 낮음→다시 노력→성적 낮음→폭식→운동→폭식→왜 살아야 하지?→이미 망한 인생, 가능하면 고통 없이 인생 마무리하고 싶다.

이런 생각에 요즘 사로잡혔어요.

단지 성적이 낮아서 제가 투정을 부리는 걸까요? 아니며 제가 우울증인가요?

 

현재 사람들과 잘 지내지만, 친한 사람 아닌 사람과 이야기할 때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장난도 많고 굉장히 밝았는데, 대학교 3학년이 되고 주변 사람에게 "왜 이렇게 조용해졌냐", "왜 이렇게 우울하게 변했어?"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병원 상담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단지 공부만 열심히 하면 해결되는 건지...

갑자기 일상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방학 때 하는 스터디도 며칠 쉰다고 조원들에게 말하고 저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집 근처 카페에서 할 일 하면서 현재 휴식 중인데, 너무 답답합니다.

글로만 봤을 때도 상담 및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면 꼭 알려주세요.

저는 정신과 상담받는 게 두렵진 않은데 이게 갈 정도인지, 단지 나의 의지 문제인지 판단이 어렵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A) 안녕하세요. 힘든 상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대 그리스어에 '에우 프라테인(eu prattei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좋은 혹은 탁월함을 뜻하는 'eu'와 행위나 행동을 뜻하는 동사 'prattein'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즉, '에우 프라테인'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잘한다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단어가 ‘잘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잘 사는 것’ 혹은 ‘행복’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고대로부터 행복하다는 것, 잘 산다는 것은 어떤 일들을 잘 해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 진료를 못한다면, 그래서 제 병원에 어떤 환자도 찾아주지 않는다면 저는 불행할 것입니다. 

그래도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거짓이나 위선일 것입니다.

'인생은 성적순 아닌가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맞는 말이기도 하고,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첫째, 제가 진료를 잘하고, 많은 환자가 저를 찾아줘서 병원이 잘 된다고 제가 ‘반드시’ 행복하진 않습니다.

이 ‘잘한다는 것’은 행복의 필요한 조건이지 충분한 조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료는 잘하더라도, 그래서 환자는 많고 병원도 잘 되더라도, 배우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자식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서 불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저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해도 행복합니다. 하지만 미술가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면 엄청 불행할 것입니다.

이 말은, 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술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겠죠.

반대로 저는 ‘진료를 잘 한다’는 것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미술가는 진료를 잘 하는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겠죠.

 

사진_픽셀

 

무언가를 잘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생이 성적을 잘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성적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적을 잘 받아서 결국에는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깊게는 내가 왜 이렇게 성적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두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자랑거리, 부모님이 부부 싸움한 적이 없을 정도로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꼭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저는 잘 하고 잘 사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봐왔지만, 부부 싸움이 없는 화목한 집은 거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질문자님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질문자님은 아마도 주위 사람들과 조화롭게 잘 지낼 것입니다.

이런 능력은 ‘대학 성적을 잘 받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아! 덧붙입니다. 질문자님이 말씀 주신 증상들, 

깨질듯한 편두통, 버스를 탔는데 숨이 가빠질 정도의 불안감, 토를 할 정도의 폭식,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의 우울감 등을 봤을 때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치료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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