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몇 년간 짝사랑해 온 사람이 있습니다.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고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고 싶지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뒤로는 다른 이성에게 전혀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도 만나지도 않고, 다가오는 이성에게도 철벽을 쳐버리는 제 자신을 보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에 빠져버린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낍니다.

 

제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고백했고, 그분에게 거절의 답변 또한 들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마음도 없으시고 살아온 환경도 너무 다르기 때문에 제가 마음을 접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너무 힘듭니다.

지금은 제가 용기 내서 가끔씩 문자로 안부 묻는 게 전부인 그런 관계입니다.

 

외로운 건 싫지만 그분이 아닌 다른 사람은 더 싫습니다.

결국 짝사랑은 사랑받고 싶은 저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왜 쉬운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고 굳이 불행한 사랑을 자초하는 걸까요?

 

제가 그분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생각해보고 환상의 존재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해보았지만 그분에 대한 마음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가슴속에 묻으려 할수록 마음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분이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궁금하고 맛있는 걸 먹을 때에나 즐거운 여행을 할 때에도 그분의 생각이 납니다.

 

짝사랑이 일방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몇 번씩 절망스러운 마음을 느낍니다.

그분의 입장에서는 마음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계속 이런 마음을 품고 괴로워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부담스럽고 싫을 테니까요.

그분의 행복을 바라지만 저의 불행을 마주할 때는 가슴이 아파옵니다.

"난 사랑했으니 괜찮다. 행복하다." 생각해도 현실 속의 저는 전혀 괜찮지 않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성숙한 사람도 되지 못할뿐더러 그분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잠들기 전에 그분의 생각이 날 때에는 너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감정이 벅차올라 울기도 합니다.

지치면 나가떨어질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러다가는 제가 죽을 때까지 달리기만 할 것 같습니다.

그분의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은 심정입니다...

시간조차 해결해 주지 않는 이 짝사랑...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안녕하세요. 짝사랑으로 오랜 시간 마음 앓이를 하고 계시군요.

질문자님께서도 절절하게 써주셨지만, 짝사랑이란 참, 늘 너무 서글프고 애달플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너무너무 보고 싶고, 늘 같이 있고 싶고, 걱정되고, 생각나는데, 그 사람은 내가 이렇게 애끓고 있다는 것은커녕, 내 생각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말 가슴을 비수처럼 파고듭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는 8살짜리 꼬마 아이조차도 같은 반 여자아이를 짝사랑하며 그러더군요.

"사랑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있나요?"라고 말이지요.

 

남녀노소, 시대와 인종을 막론하고 짝사랑은 늘 아픈 것 같습니다.

질문자님께서 말씀하신 짝사랑의 슬픔 또한 그런 범인류적 비극의 연장선에 있어서 언젠가는 질문자님께서 충분히 극복하실 수 있는, 그렇게 되어 한걸음 성장하실 수 있는 과정 중의 하나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하다고 한다면 질문자님께서는 지금, 정신과 의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만큼 정신의 문제를 앓고 계신 게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시련을 겪고 계신 중이겠지요.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이렇게 자세히 사연을 보내주신 김에 제가 한걸음 더 섣부른 추측을 해보자면, 어쩌면 질문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나에게 냉담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고 매달리게 되는 상황의 연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질문자님께서 지금의 이 짝사랑 이전에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나에게 냉담한 사람, 나를 버리는 사람에게 끌리고 매달렸던 적이 있으시다면 더욱 그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상황'이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결국 짝사랑은 사랑받고 싶은 저의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인가요?", "그렇다면 저는 왜 쉬운 사랑을 하려고 하지 않고 굳이 불행한 사랑을 자초하는 걸까요?"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어쩌면, 질문자님 스스로 떠올리신 저 자문이 스스로의 문제를 꿰뚫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질문자님께서 과거로부터 이러한 불행의 반복을 계속해서 경험해보고 계신 것이라면 말이지요.

어쩌면 질문자님께서 그 사람이 질문자님의 마음을 거절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마음을 접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그런 사랑을 찾고 계신 것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_픽셀

 

Jeffery E. Young이라는 심리학자는 우리의 인생을 옭아매는 '인생의 덫'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인생의 덫이란 태생적으로, 혹은 성장환경에 의해 생긴 어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핵심적인 생각, 핵심적인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아주 깊은 무의식 속에 있는 경우가 많고, 대부분 현재의 객관적인 상황과는 맞지 않게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를 고통과 번뇌로 이끄는 경우가 많지요.

마치 덫처럼 우리를 잡아맵니다.

덫에 걸린 사슴이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리를 버둥거릴수록 덫의 날카로운 이빨은 더욱 깊이 살을 파고드는 것처럼, 인생의 덫은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통해 스스로 더욱 강력해집니다.

 

그러한 인생의 덫 중 Young 박사가 이야기한 한 가지는 '정서적 박탈의 덫'입니다.

'나는 결코 사랑받을 수 없을 거야'라는 핵심 믿음이 빚어낸 덫이지요.

마찬가지로 이 덫 또한 '사랑받을 수 없을 거야'라는 믿음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노력, '사랑받고 싶어'라는 발버둥을 이용해서 스스로 더욱 강력해집니다.

사랑받고 싶어 애쓰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사랑받을 수 없는 상황, 버림받고 마는 상황으로 이끌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꼴이 되어 버리게 됩니다.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인생의 덫에 굴복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너무나 벗어나고 싶지만, 덫에 걸려 있는 상황-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는 상황이 가장 익숙하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그 상황이 가장 편안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고요.

버림받고 슬퍼하는 것은 너무나 많이 해봐서 익숙하지만, 진정으로 사랑받고 아낌을 받는 상황은 익숙하지 않아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질문자님께서도 '굳이 불행한 사랑을 자초'하고 있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스스로가 '사랑받을 수 없어'라는 정서적 박탈의 덫에 걸려 계신 것은 아닌지 돌아보실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덫은 너무나 강력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덫을 재현할만한 상대를 찾아내고, 그 상대에게 강력한 끌림을 느끼게 만들곤 합니다.

나를 그 덫으로 다시 끌고 들어갈만한 상대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지요.

가장 극단적이지만 가장 흔한 예가 '알코올 중독 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자란 여성이 알코올 중독자 남편을 만나게 되는 경우'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덫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물론 애초에 질문자님의 짝사랑이 이런 '인생의 덫' 같이 심오한 정신역동 때문이 아닌, 누구나 겪는 흔한 짝사랑이라고 한다면 사실 시간이 잘 해결해줄 것입니다.

더 좋은 사람이 분명 나타나거나 그 사람이 질문자님의 진심을 알아주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다들 그래 왔고요.

그렇지만 만약 질문자님께서도 스스로 얼핏 직감하고 계신 것처럼 이 상황이 질문자님 스스로가 만들어낸, 스스로가 재현해낸 인생의 덫이라고 한다면 조금 더 진지하게 스스로의 덫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진_픽셀

 

그래서 우선은 '나는 왜 이 사람에게 이렇게 끌리는가'를 고민해봐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끌리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가슴 아프도록 끌리는 이유가 나의 덫이 발동해 눈을 가린 탓이라면 지금의 마음을 다시 고민해봐야 할 수 있겠지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좋은 방법은 과거에 관계 과거의 사건들을 통해 돌아보는 것입니다.

꼭 연인관계, 애정관계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를 고통으로 이끌었던 관계들을 되새겨보고, 그 안에서 반복되는 패턴들을 분명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지금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괴로움이 과거 패턴의 반복 속에 있다면 그것이 내 덫의 '함정'이다 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간다면, "나는 사랑받을 수 없어"라는 핵심 믿음에서 나와 나 스스로가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나를 좋아하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의 보살핌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어"라는 느낌에 충분히 스스로 공감할 수 있을 때에 좀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겠지요.

방법 중의 한 가지는 지금 현재의 대인관계들, 과거의 관계들을 목록화해보는 것입니다.

나를 배려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관계가 있다고 한다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에 좀 더 집중하고, 그 관계에서의 사랑을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 강화해 나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답변이 조금 길어졌습니다.

사실 어쩌면 평범한 짝사랑의 이야기일지 모르나, 질문자님의 독백 가운데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가 있어 사족을 붙이다 보니 불필요한 첨언이 되었던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쪽이건 간에 질문자님께서 지금 겪고 계신 이 아픔에 조금 더 집중하고 이겨내려 노력할수록 분명 더 성숙해지실 수 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를 앞으로 만들어나갈 수 있을 만큼 말이지요.

모쪼록, 질문자님 사랑에 건투를 빌겠습니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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