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일주일 5일씩, 하루 8시간 일했다.

그나마 몸이 멀쩡하고 작업 속도가 빠른 사람은 한 달에 23만 원을 받았다.

 

사진_픽셀

 

장애인 보호작업장으로 부르심

 

조현병으로 군대를 면제 받고 남자로서는 조금 이른 25살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취업할 용기도 없었다. 어두운 마음만큼이나 어두운 표정의 얼굴을 하고 면접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모교의 평생교육원에서 사회복지사 2급 취득 과정을 소개하는 포스터를 봤다. 교육원에 다니면 학교에 남아 동아리 활동도 병행할 수 있었다. 1년 과정 동안 취업을 미룰 명분도 생긴다. 20년간 복지관 자원봉사자로 일해 오신 어머니의 동의를 구해 과정에 등록했다. 또래가 아닌 다소 나이가 있으신 아저씨, 아줌마들과 수업을 들었다. 수업 내용도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1학기가 끝나고 방학 동안 의무적으로 복지 관련 실습을 나가야 했다.

강북구에 있는 장애인보호작업장에 실습생으로 등록했다. 지적, 지체 장애인,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었다. 나는 함께 작업하면서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첫날 원장님과 간단한 면담을 하고 작업장에 들어갔다. 안에는 대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양말과 포장지, 상자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30여 명의 장애인이 둘러앉아 포장지에 양말을 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참 안됐다고 느꼈다.

 

 

이해할 수 없었던 행복

 

“여기서 왜 일하고 있나?”, “차라리 집에서 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얼굴과 몸이 마비되고 뒤틀린 지체 장애인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데 막상 말을 걸면 이상한 어투와 발음으로 알아듣지 못할 대답을 하는 지적 장애인도 있었다. 참 착잡했다.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까지 한창 팔팔할 청춘들이었다.

“이 작은 작업장 안에서 뭘 하는 건지.. 대체 저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아니, 저들의 부모는 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자식이 저 지경으로 태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3년 터울의 두 형제가 모두 장애를 가진 부모도 있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여기 죄다 모아 놓았구나!”라고 생각했다.

머리핀 조립하기, 선물용 작은 상자 접기, 양말에 스티커 붙이기를 하고 있으면 도저히 지겨워서 견딜 수 없었다. 원래 내성적이고 말이 없던 나다. 하지만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앉아 일하는 장애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한편으론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경청했다. 서로 이야기를 하다가 한 명이 “정말, 어이없어!”라고 했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어이야! 어디 있니?”라며 장난스런 농담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웃기다며 여기저기서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이런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론 수준 낮은 한 마디 유머였지만 환하게 웃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동안 불평, 불만으로 지내며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힘들 때마다 곁에서 누군가가 위로해주었지만 전혀 고마워하지 않고 당연스레 여겼다. 오히려 그들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에 상처받아 공격적으로 대했다. 그런 내가 부끄러웠고 그들의 밝은 모습이 부러웠다.

오전 작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자 눈앞에서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작업장 스피커를 통해 유행 가요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비교적 몸이 성한 장애인 대여섯 명이 앞으로 나와 웃으며 춤을 추는 것이다. 그저 손과 몸을 좌우로 흔드는 막춤이었다. 앉아서 지켜보던 다른 장애인들도 박수를 치며 흥을 돋웠다. 그들의 나이는 이미 어른이었지만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어른들의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도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같이 춤추자고 부추기는 것이다. 할 수 없이 팔만 위아래로 흔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사진_픽사베이

 

차별과 슬픔 속에서

 

사실 그곳 장애인들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그들은 일주일 5일씩, 하루 8시간 일했다. 그나마 몸이 멀쩡하고 작업 속도가 빠른 사람은 한 달에 23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몸이 심하게 불편하거나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작업 속도가 느려 한 달에 10만 원도 받지 못했다. 가끔 어머님들이 와서 자녀 곁에서 작업을 도왔다. 어머님들은 작업을 하면서도 그들을 챙기고 보살폈다. 장애가 있어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모두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매일 푸드 뱅크에서 온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간식도 받았다. 평소 음식을 가리지 않는 나였다. 하지만 그날의 음식은 사람이 먹어도 될지 의심이 될 만큼 먹음직스럽지 않았다. 그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행복해하는 장애인들을 보며 신기하면서도 안타까웠다. 돈 버는 것과 먹는 것 말고도 그들이 겪어야 할 장벽은 많았다.

한 번은 작업을 마치고 퇴근하던 중 길 건너편에서 무리를 지어 집에 가는 장애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던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 것이다. 분명 버스 기사는 장애인들을 보았다. 일부러 태우지 않고 지나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화가 났다. 도저히 납득이 안됐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무시를 받고도 전혀 화난 표정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웃으며 수다를 이어나갔고 다음 버스를 기다릴 뿐이었다. 더 내 마음을 짠하게 했던 건 그들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다는 사실이다. 작업장 복지사의 말에 따르면 1년에 두세 번은 장례를 치른다고 한다. 아직 20, 30대의 그들이지만 1년에 두세 번은 동료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30명의 정해진 정원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동료를 맞이한다.

 

 

좌우명이 된 소원

 

나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들도 소원이 있을까? 어떤 것을 위해 기도를 할까? 하늘을 원망하지는 않을까? 나처럼 건강하게 해달라거나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을까? 결국, 용기를 내 한 사람에게 물어봤다.

“혹시 소원이 뭐예요?” 그가 들려준 대답은 뜻밖이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일 열심히 할 수 있게 해주세요.”

너무 착한 소원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 제목은 다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들 대답이 한결같았다.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열심히 일하게 해주세요.”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깨달았다.

“그렇구나..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 열심히 사는 것. 이 두 가지만 이룰 수 있으면 내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구나..”

그제야 그들이 점심시간마다 음악에 맞춰 춤추고 행복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내게도 좌우명이 생겼다.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 물론 지금도 이 두 가지를 완벽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생의 최우선으로 삼아 매일매일 노력하고 있다.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화날 때도 있다. 그때마다 그들을 생각한다. 내게 귀하고 값진 가르침을 준 고마운 사람들. 불평하고 투정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해 준 사람들. 내 인생에 좌우명을 준 참 스승들이다.

 

 

 

* 정신의학신문은 특정 종교와 무관한 언론사입니다. 옥탑방 글쟁이님의 글을 통해 조현병에 대해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 정신의학신문에서 독자기고 칼럼을 게재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 게시판 -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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