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망설임 없이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

 

사진_픽셀

 

합격으로 변하지 않는 삶

 

늘 어둡고 힘들기만 했던 인생에도 행복이 찾아 왔다.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과는 달랐다. 좋은 대학과 좋은 회사, 아름다운 사람과의 연애와 결혼, 내 집 마련과 두둑한 지갑에서 오는 건 아니었다. 그냥 편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함께 운동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서로 축하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3월이 다가오고 각 대학들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한창이었다. 합격 소식을 기다리는 고통스런 시간들도 거의 끝나갔다. 다행히 하향 지원했던 대학에 합격했다. 게다가 점수에 맞춰 지원했던 국민대는 내 위에 예비 합격자가 5명 남아 있었다. 결국 입학식을 불과 3일 남겨 놓고 최종 합격했다. 학교 위치도 미아리 집에서 가까운 정릉에 있었다. 버스로 15분 거리고, 걸어서는 30분 거리였다. 이제 대학 생활의 낭만을 즐기며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지고 인생도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 새내기 생활부터 쉽지 않았다.

 

입학 첫날에 보니, 동기들은 이미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서로 알고 있었다. 늦게 추가 합격한 동기들은 친해지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난 친구 만드는 방법을 몰랐다. 심지어 정상적인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내성적인 성격에 사람과 대화를 안 하고 살아온 결과다. 누군가와 편하게 대화를 나눌 정신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 학기 초부터 친구가 없었고, 공강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 2~3시간의 수업을 듣고 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약의 부작용

 

이후로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했다. 캠퍼스 생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서울대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으며 날마다 약을 먹었다. 자기 전에 약을 먹으면 억지로 잠들 수는 있었다. 그러나 하루 12시간 이상을 잠에 빠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자는 동안에도 편하게 깊이 잘 수 없었다. 머리에 두통이 느껴질 정도로 아프고 몽롱했다. 그렇다고 깨어 있지도 못한 채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새벽 한, 두 시 부터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서까지 불편한 잠에 빠졌다. 깨어 있어도 정신은 늘 몽롱했다. 언제나 졸음이 쏟아지고 머리가 아팠다. 이건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잠을 자는 것도 아니었다.

 

약의 부작용은 이뿐이 아니었다. 많은 양의 음식을 먹지 않아도 체중이 늘어났다. 학창시절 빼빼 말랐던 내가 비만이 된 것이다. 약에 의해 호르몬이 비정상적으로 분출되어서인지 혀가 늘 말라 있었다. 침샘이 분비되지 않았고 입에서 냄새도 났다. 그래서 누군가와 말을 하려면 혀를 물로 적셔야 했다. 늘 생수병을 들고 다니며 말하기 전에 한 모금씩 들이켰다.

 

이처럼 독한 약을 먹는데도 정신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과거의 상처와 말들이 계속 떠올랐다. 대학 생활도 엉망이 되어갔다. 평일에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했기에 시간표를 원하는대로 짤 수 없었다. 어쩌다 오전 수업이 잡히면 약에 취해 잠을 자느라 강의를 빠지곤 했다. 마음이 왠지 허탈했다.

 

“내가 이곳에서 이런 생활을 하기 위해 그 고생을 했던 것일까?”

 

스스로 지금 내 모습에 만족할 수 없었다. 어쩌면 더 높은 대학에 가면 내 삶이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입학 후 1학기 내내 반수를 해야 할지 말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현재 대학 생활에 더욱 집중할 수 없었다.

 

사진_픽사베이

 

캠퍼스를 방황하던 중 만난 선배

 

어느 날, 아무 목적과 생각도 없이 캠퍼스 거리를 걷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인생의 소망을 잃은 듯 무표정한 얼굴로 걸었던 것 같다. 양 어깨는 축 처진 채 신발을 끌며 걷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다가왔다. 자신은 기독교 동아리 선배라고 소개했다. 학교 재학생으로 보기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졸업한 사람 같았지만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오랜만이라 내심 반가웠다.

 

그 선배는 내게 밥은 먹었는지 물어봤다. 난 대학에서도 늘 밥을 혼자 먹었다. 그래서 밥을 사준다는 선배를 흔쾌히 따라갔다. 사실 날 전도하려는 목적임을 알고 있었다. 나와 가족은 무신론자다. 오히려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학창시절에도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에게 신은 없다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힘든 시기를 지나며 종교에라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날, 기독교가 아니라 천주교, 불교, 심지어 사이비 종교에서 왔더라도 난 따라갔을 것이다. 그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배는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내게 “전공은 무엇이냐?”, “취미는 무엇이냐?”, “학교생활은 어떠하냐?” 등을 물어봤다. “언론학이고, 코미디 좋아하고, 학교생활은 재미없어요.” 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사람 자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선배는 동아리 방에 함께 가보자고 했다. 예전의 나 같으면 강하게 거절했을 텐데.. 그날은 웬일인지 무언가에 이끌리듯 따라갔다. 학교 건물 지하에 위치한 작은 동아리방 안에는 처음 보는 형들과 누나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본 가족을 만난 듯 웃으며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동아리 사람들의 눈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사람들의 눈과 달랐다. 눈빛이 선하고 편하게 느껴졌다. 그 눈빛에 마음이 놓였고 경계심을 풀었다.

 

 

동아리로 초대

 

선배는 나를 앉힌 뒤 책상 위에 성경책을 펼쳤다. 내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망설임 없이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머릿속 전쟁에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밤마다 나쁜 생각에 시달리다 소리를 지르며 악몽에서 깨는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하루라도 약 없이 그냥 누워 있다가 졸려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드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선배는 언젠가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거라고 대답해주었다.

 

선배는 내게 일대일 성경공부를 제안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에 대해 읽고 공부하며 생각을 나누자는 것이다. 난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교회도 유치원 때 지나가던 친구가 가자고 해서 한 번 따라갔다가 귀찮아서 다시는 안 갔다. 그때 말고는 성경이나 교회에 대해 전혀 몰랐다. 다만 나도 이곳 사람들처럼 선한 눈빛을 갖고 싶었다. 그동안 다들 내 눈빛을 보며 무서워했다. 나도 누구나 쉽고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눈빛을 갖고 싶었다.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선배가 있는 동아리 방에 가서 성경공부를 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간음하다 잡힌 사마리아 여인’,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베드로‘ 등등 성경 속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배울 수 있었다.

 

 

처음 겪은 교제의 즐거움

 

처음에는 동아리에서 성경공부만 했고 다른 선배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나 선배들이 먼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어 주었다. 처음에는 단답형으로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생수병을 들고 혀를 적셔가며 조금씩 길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나보다 먼저 동아리에 가입한 동기도 성격이 쾌활하다 보니 먼저 웃으며 다가와 주었다. 그렇게 난 동아리 사람들과 조금씩 친해져가며 말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동아리에서 성경공부 외에도 선배 형들과 탁구, 농구, 축구를 즐기게 되었다. 주말에는 지방 출신 선배들이 모여 사는 합숙방에 가서 함께 고기도 구워 먹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형들은 월 10만 원의 회비를 내고 학교 근처 합숙방에 모여 살았다. 아침마다 당번을 정해 밥을 해서 나눠 먹었다. 형들은 함께 공부하고 함께 잠을 자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곳에 놀러 가면 마음이 편했다.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안정되었다. 가끔 밤에 심심하면 합숙방에 가서 형들과 잠을 자기도 했다. 한밤이나 새벽 중에 집에서 잠이 오지 않거나 괴로울 때도 수시로 합숙방을 찾았다. 합숙방은 늘 문을 잠그지 않았고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새벽 2시 건, 3시 건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울 때 집을 나와 합숙방에 들어갔다. 형들이 모두 잠들어 있으면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면 형들은 날 반가워하며 아침 식사를 차려 주었다. 형들이 차려 주는 아침밥은 정말 맛있었다.

 

사진_픽셀

 

동아리 생활의 시작

 

자연스레 일요일에는 여러 학교 동아리 사람들이 모여 연합으로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갔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각 학교 동아리별로 모여서 밥을 먹었다. 끝나면 축구나 탁구 같은 운동을 하고 고기도 먹으며 교제했다. 그렇지만 내가 바로 하나님을 믿은 건 아니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이 있었구나.. 생각만 할 뿐 큰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성경 속 이야기처럼 내 병도 하나님이 치료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아리 생활을 하며 토요일마다 소감발표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동아리 학생들은 매주 모여 선배들 앞에서 성경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발표했다. 독이 퍼진 몸을 치료하기 위해 칼로 환부를 도려내듯 저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를 고백했다. 나 역시 말씀을 빗대어 살아온 과거를 발표했다. 그리고 나를 괴롭히는 악한 생각들을 털어 놓았다. 왠지 창피했지만 선배들은 그런 나를 응원하고 격려해주었다. 발표를 통해 죄를 고백하고 나면 마음이 시원하고 개운했다. 한 번은 200페이지 인생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사소한 것 하나까지 모두 써야 했다. 그렇게 노트에 모은 글이 200여 페이지다. 쓰는 동안 힘들었고 발표를 하면서도 지쳤다. 그러나 당시의 노트가 오늘날 이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소감발표를 통해 내 안의 죄를 직면할 수 있었다.

 

 

성적보다 중요한 것

 

어느덧 대학교 1학년 생활이 끝나갔다. 여전히 약에 취해 하루의 절반을 잠으로 지냈다. 낮은 출석률로 인해 성적도 학과에서 꼴찌에 가까웠다. 시험 공부도 감당하기 힘들어 성적이 늘 바닥이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낮은 점수로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학교 성적보다 마음의 건강과 행복이었다. 그래서 더욱 동아리 생활에 집중했고 조금씩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가고 있었다.

 

대학 생활을 하며 좋은 학점과 스펙, 토익 점수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은 나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었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를 알려 주었다.

 

가장 감사한 건, 대학교 새내기 때의 소원을 이룬 것이다. 지금도 약은 계속 먹지만 잠을 편하게 잘 수 있게 되었다. 신약이 개발되어 약의 부작용에서도 벗어났다. 말하는 것도 남들처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눈빛은 물론 얼굴도 편한 인상으로 변해왔다. 가끔 내 과거 사진과 지금까지의 사진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놀란다. 어두운 표정에 매서운 눈빛의 과거 사진과 부드러운 눈빛과 편한 표정의 현재 사진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예전보다 표정이 밝아졌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 이야기를 15년째 계속 듣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다. 아마도 15년 전부터 밝아져 왔고 지금도 밝게 변해가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 정신의학신문은 특정 종교와 무관한 언론사입니다. 옥탑방 글쟁이님의 글을 통해 조현병에 대해 잘못된 인식이 바뀌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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