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박기홍 소아정신과 전문의]

 

오늘은 한글 준비하기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그런데 한글 배우기, 학습하기, 익히기 등이 아니고 왜 ‘준비하기’ 일까요? 한글이라는 문자는 대단히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나 배우기 쉬우면 지혜로운 자는 아침나절이면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정도면 배울 수 있다고 정인지 어르신께서는 장담을 하셨을까요? 배움에 목말랐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어도 ‘어깨 너머로’ 한글을 배웠다고 하니, 우리 한글은 참 배우기 쉬운 글인 것 같습니다.

 

사진_픽셀

 

하지만 한글을 배우기가 모두에게 쉽지는 않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약 20%의 사람들은 한글 배우기가 만만하지 않고 5%정도는 한글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읽기가 가능해졌다고 해도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읽기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문자를 통한 정보습득의 수단입니다. 정확하게 읽을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유창하게 읽을 수 있어야하고 그 정확하고 유창한 읽기를 기본으로 이해와 사고가 종합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한글학습지나 시작해볼까?’가 아니라 잘 준비된 한글습득 토양 위에 한글 학습이 시작될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 준비를 잘 하기 위해서는 한글 습득의 뇌과학을 잠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읽기의 뇌과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연구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언어검사에서 음운인식능력이 부족함을 보였고, 이 능력과 관련된 뇌기능부위의 활성이 저하되어 있다는 소견을 보였습니다.

 

 

음운인식능력이란 음성언어 즉 말소리를 듣고 그 말소리의 구조와 구성을 알아채는 능력입니다. 긴 문장을 어절로 나누고, 어절은 독립된 소리인 음절로 나누고, 음절은 최소의 소리 단위인 음소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위의 결과를 뒤집어서 말하면, 아이들이 잘 읽을 수 있으려면 음운인식능력이 잘 발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읽기를 준비하는 과정은 아이들의 음운인식능력이 잘 자라나도록 좋은 자극을 주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기 과정인 읽기에서 음운인식능력이 왜 나오는 걸까요? 읽기가 시각적인 과정을 이용하는 것은 맞지만 생각해보면 문자란 소리를 기호로 바꾸어 놓은 것이니 소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면 문자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 머릿속에 잘 짜인 음 체계가 없다면 악보를 보고 그 노래를 흥얼거릴 수 없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사람의 말소리에 대한 인식능력이 부족하다면 문자라는 기호를 소리로 환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겁니다. 잘 읽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읽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음운인식능력은 매우 절대적입니다. 음운인식능력을 토대로 하지 않고 통글자를 암기하여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글을 배우는 과정이 어렵고 독서의 질에서 음운인식능력을 토대로 한 읽기보다 매우 부족함을 보인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유창하게 잘 읽어서 잘 이해하고 사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운인식능력의 발달은 말소리에 대한 관심과 흥미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과 동화책, 동요 등에는 이런 음운인식을 자극하는 반복어구나 의성어, 의태어, 운율 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말놀이에 노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말소리를 재미있게 가지고 노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이 소리와 저 소리는 비슷하고 이 말과 저 말은 같은 소리로 시작되고, 이 말과 저 말은 처음은 다른 데 끝나는 소리는 비슷하구나’ 등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음운인식능력이 점점 발달해가는 과정입니다.

 

미국 터프츠 대학의 아동발달학 교수이며 읽기 연구로 유명한 매리언 울프는 그녀의 저서 <책 읽는 뇌>에서 위의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마더 구스(서양의 전래 동요)의 가사에 들어 있는 운율, 리듬, 각운의 흐름을 들을 때 사용되는 기술들이 모두 합쳐져 아이의 “음소인지능력‘을 촉진한다. 언어의 이러한 음운론적 측면의 발달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살펴보면 말놀이, 농담, 노래에 들어 있는 각운, 첫 번째 음성, 마지막 음성 등으로 체계적인 놀이를 하면 아이의 독서 학습 준비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복어구, 의성어, 의태어, 운율 등을 접하고, 같이 해보고 따라 해보는 말놀이와 더불어 단어 글자 수만큼 박수치기 놀이, 같은 글자 수의 단어 말해보기, 같은 첫음절 단어 말해보기, 같은 끝음절로 끝나는 단어 말해보기(예, 리리리자로 끝나는 말은?), 끝말잇기 놀이, 단어 거꾸로 말하기, 예능프로그램 등에서 소개되었던 절대음감게임 등은 음운인식을 촉진하는 매우 즐거운 작업이 될 수 있습니다. 뭔가를 가르친다는 생각보다는 이런 말놀이 자료들을 가지고 아이들과 즐거운 상호작용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음운인식능력의 촉진, 즉 읽기의 준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음운인식능력과 관련된 것과 더불어 자녀의 읽기 준비에 매우 필수적이고 중요한 방법 두 가지를 더 말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대화입니다. 읽기는 음성언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듣고 말하는 음성언어의 발달은 읽기에 필수적입니다. 당연히 이를 자극하는 최상의 방법은 자녀와의 대화이겠지요.

 

사진_픽셀

 

또 하나는 바로 책읽어주기입니다. 부모의 품에서 부모가 읽어주는 책을 듣고 보는 자란 아이는 저절로 인쇄물에 대한 친근감과 지식을 획득합니다. 앞서 언급된 음운인식능력이 자극 받을 수 있는 재미있는 글들을 접할 수도 있겠지요. 읽을 수 있게 되더라도 읽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어휘력과 배경지식이 풍부해야 합니다. 부모의 책 읽어주기는 이런 것들을 대단히 많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아동용 책에서는 대학생의 말보다 50%나 많은 낯선 어휘를 만날 수 있다고 하네요. 수십 년 간 수행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보낸 시간의 양이 몇 년 후, 그 아이가 성취할 독서 수준을 예언하는 좋은 척도가 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화와 책읽기 과정에서 아이와 부모 사이에 무한한 사랑과 친근감이 쌓여갈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관계가 없으면, 의미 있는 학습도 없다.”

 

일찍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영재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뉘 집 아이는 벌써 읽기를 한다더라하며 불안감에 싸여, 또는 경쟁 심리로 준비되지 않은 아이에게 주입식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일찍 읽을 수 있기보다는 준비되어 잘 읽을 수 있기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읽기 교육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그리고 제 자녀들과 자주 읽었던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 한편과 함께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비빔밥

최승호

 

비버들이

비빔밥을

비비고 있네

왜 비버들이 비빔밥을 먹지?

비빔밥이 비버밥이었나?

아이고 매워!

비버들이 혀를 내미네

아이고 매워!

혀에 불이 난 것 같다.

 

 

박기홍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이나래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및 동대학원 졸업, 신경정신과 전공의 수료
서울대학교병원 소아정신과 임상강사 역임
서울시교육청 특별상담 전문의 역임, 도립 마음사랑병원 진료과장 역임
군산시정신보건센터 상담전문의, 전라북도 청소년정신건강증진 위원, 청소년상담지원센터 협력전문가
전체기사 보기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