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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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겨울이다. 여름보다는 백만 가지 이유로 겨울을 선호하지만, 한 가지 조건만 매일 주어지면 지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봄은 여름을 불러오는 계절이어서 어쩐지 여름이 점점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 반기지 않았다만 이제는 전보다 봄을 반갑게 맞이하곤 한다. 

식물과 함께 하면서 봄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식물 키우는 사람들끼리 봄을 ‘마법의 계절’이라고 부르곤 한다. 식물들이 지쳐가는 것을 바라보며, 봄의 별명을 기억해 내며 ‘마법의 힘’을 가진 봄의 위력을 고대하게 되었다. 식물은 봄이 오면 몰래 준비해온, 새싹이며 새 잎들을 누구에게 질세라 내놓기 바쁘다. 안되던 것들이 되고, 죽던 것들이 살아난다. 잘라내도, 뿌리를 나누어 잘라내도 살아낸다. 정말 ‘마법의 힘’이다. 

 

봄의 초록은 연두빛이다. 봄의 초록이 연둣빛이라면 여름의 초록은 푹 익은 짙은 초록이다. 나는 이 둘이 가진 서로의 싱그러움이 참 좋다. 햇빛의 질, 양, 색 모두 달라진다. 마치 집에서 농도별로 다른 전구를 켜고 끌 때처럼 봄의 해가 그렇다. 봄의 해는 해사하다. 모든 새로운 것들을 위해 준비된 조명만큼 맑고 부드럽다. 새 잎들은 이 부드러운 빛을 잔뜩 받고 엄청난 속도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식물이 돼버린다. 변화의 광경을 보고 있자 하면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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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게 이렇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데, 사람에겐 얼마나 귀한 기운을 주겠는가. 우리도 새봄엔 새싹이 된다. 칙칙한 옷보다 한 층 밝은 옷에, 한 층 얇은 옷에 자꾸만 손이 간다. 간편한 차림에 생각도 한 층 밝고 가벼워진다. 완전히라고 하지 않는다. 딱 ‘한 층’ 정도이다. 우리의 고민과 염려는 그리 만만하지 않음으로. 그럼에도 봄은 분명히 더 자주 창문을 열게 하고 전보다 몇 번은 더 바깥으로 나서게 한다. 

겨울이 ‘견디는 일’이라면 봄은 ‘시작하는 것’이다. 겨우내 견디며 쌓아 둔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슬쩍 내 보여도 환영받기 좋은 때, 그런 계절. 

그러나 나는 아직 봄에게 내 마음을 모두 내주지 못했다. 해사한 햇살이 남에게 나를 선명히 보이게 하고, 내가 하던 모든 것을 힘껏 시작하는 ‘새것’으로 보이게 한다. 때론 봄에 우울하고 골방에서 울고 괴로워하는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아 난감하기도 하다. 나는 어느 계절에도 그저 ‘나’인데 계절이 나를 웃으라 말하는 기분이다. ‘칙칙함’은 금지라도 된 마냥 내가 또 겉도는구나 하고 좌절하게 한다. 그렇게 또다시 소외를 느낀다. 계절이, 그 계절이 품은 사회가, 사회가 품은 사람들이 모두 밝게 걸을 때, 축 처진 등을 이끌고 어서 집에 숨는 내가 겨울보다 더 외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흐르고, 지난한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겨울이 가고 조만간 언제 추웠냐는 듯 봄이 올 것이다. 작은 새싹들을 굽어살피고, 탄성 지르고, 나무마다 피는 색색의 꽃에 작은 감동을, 작은 흥분을 느끼며 약간은 붕 뜬 기분으로, 한동안 추워 걷지 못했던 곳들에 가 걸을 테다. 봄은 겨울을 이겨낸 우리에게 주어지는 ‘달콤한 상’과도 같아서 아쉬울 때 사라지니 알아서 잘 챙겨 누려야 한다. 

어제는 함박눈이 내리고 글을 쓰는 오늘은 추워져 창문도 용기 내어 열어야 하는 끝 겨울에, 이토록 낭만적인 ‘봄에 대한 기억 되살리기’라니, 어쩐지 발끝에 꽃잎이 채이고, 고개를 들면 가로수마다 새싹을 터뜨리고 있을 것 만 같은, 상상이 상상을 불러오는, 지루하고 추운 날의 기록이다. 

이렇게 추운 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상상과 견딤…, 기다림 아니겠는가. 
 

2024년 3월

심경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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