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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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여 꽤 긴 시간을 한 지역에서 살게 되었다. 이 지역의 단점을 하나 말하자면, 주말 내내 사람이 많아 나가는 것을 꺼려 하게 된 점이다. 내가 사람이 많은 곳에 있는 것을 잘 못 견뎌 내기도 하고,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해야 할 일이 그다지 없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한 가지 단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점을 거론하자면 꼽는 데 순서만이 문제일 뿐이다. 그중 제일을 꼽자면 평일 저녁시간에 산책하기 참 좋다는 것이다. 일찍이 닫는 상점들과 구불구불 빈 길이, 마음대로 들쑤시며 걷는 내 스타일에 딱이다. 

산책의 속도는 차로 즐기는 드라이브와 완전히 다르다. 차의 속도는 내 두 발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모든 것을 제쳐 나가는 시원함이 있다면, 산책의 속도는 제아무리 빨라도 두 발이 낼 수 있는 한계 속도가 있다. 어쩌면 답답하게, 그러나 꾹 눌러 걷는 정직한 한 발자국씩 떼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진전도, 풍경의 변화도 없다. 나는 이 속도에서 살필 수 있는 시야와 천천히, 다소 느리게 변하는 내 배경이 참 마음에 든다. 산책을 하며, 꽤나 즉흥적인 내가 또 안정적이길 바라는 모순을 안고 단골 가게를 점 찍듯이 만들어 가는 것에 쾌락과 동시에 ‘내 지역’이라는 다소 풍부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사람이 걷는 많은 목적 중에 가장 천천히, 여유롭게 지나는 모든 것에 참견하는 종목이 산책일 것이다. 열 발자국 앞에 신호등이 바뀌어 있어도 급히 뛰어 저 대열에 합류할 압박감조차 없다. 

주로 집에서 작업하는 특성상 목표를 만들어 내더라도 근처 산책을 나서는 편이다. 한여름의 극한 폭염, 한겨울의 폭설과 같이 견디기 힘든 날을 제외하면, 훌륭히 산책을 해낼 수 있는 날은 그리 넉넉치 않다. 코가 시리거나 가만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극단적인 계절은 ‘이래도 산책할 거야?’라며 나를 집 안에 머무르게 한다. 

산책의 시작은 꽤 오래 되었다. 오래전, 집에 들어가기 싫었던 어느 날부터 자연스레 걷게 되었다. 완전한 번화가에서부터 그때그때의 컨디션과 날씨에 따라 거리를 정해 걸어 집에 들어갔다. 아주 천천히. 대문 앞, 집에 다다르면 종아리가 뻐근해져 있지만 매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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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것은 나를 사색하게 하고 이따금씩 현재의 여러 문제들을 직면하게 하였다. 모든 걸음이 나를 다그치고, 칭찬하고, 후회하게 하였다. 나는 그 상념들 속에서 새 프로젝트를 꾸렸고, 사람에 대한 생각을 다시금 고요히 했다. 내게 중요함과 덜 소중한 것들의 순위를 매기기도 했다. 직면한, 그러나 여전히 회피하고 싶은 문제를 들여다 볼 용기와 시간이 되어 주기도 하였다.

나의 20대 전반에 산책이 없었다면, 나는 더 날이 서고, 섣부른 선택을 하고, 순서 없이 까불었을 것이다. 소중함을 깊게 되새기지도, 피할 수 있는 문제는 빙-돌아서라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잔잔한 나의 내면은 어느덧 시끄럽기만 하여, 나는 더 쉽게 무너졌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한 발자국씩 성실히 걷는, 나라는 사람이 꽤나 괜찮은, 두고 볼 만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나쳤을 것이다. 마디마디 선택의 순간마다 내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번져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나른히 걷는 이 행위가 가져다준 큼직하고 든든한 사적 행복은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다만 내가 권하는 이가 주로 머무는 곳이 산책에 알맞은 지역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 소망만으로 그만두길 반복한다. 마치 집 근처 맛집을 발견하고서 가장 생각나는 친구에게 연락해 보지만, 그 친구가 맛집을 체험하려면 우리 동네로 와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처럼 말이다. 

주변 많은 사람들이, 특히 주치의 선생님이 나에게 산책이라는 말을 과연 몇 번이나 하셨을까. 셀 수 없는 회유 내지는 권유 사이에서 나는 그저 자신없이 웃기만 했다. ‘우울증에는 산책이 좋다.’라는 문장은 정신의학과 교과서 어느 챕터에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널리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우울증 환자가 산책까지 한다는 것은 오르내리는 컨디션 중에서 꽤나 괜찮은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산책은 그 ‘괜찮다’ 싶은 컨디션이 조금 더 유지될 수 있다는 의미다. 산책에 진심이었던 내가, 산책은커녕 침대 밖으로 나서는 것이 ‘일’이 되었을 때, 산책은 불가능한 미션이고, 그것을 못하는 나는 한심하고 답답한 환자에 그쳤다. 그것이 주는 무력함은 얼마나 상처가 되던지. 어느새 산책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존재인 것이다. 

침대에 누워 눈물을 참는 삶과 느릿한 산책을 길게 즐기는 삶 사이에는 아주 큰 벽이 있다. 이 새벽, 오늘의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오늘 비록 침대에, 집에 머물러도 괜찮다. 내일도 모레도 시간과 날들은 충분한 텀을 두고 나를 차분히 기다릴 것이다. 내가 묶인 올가미를 벗어나, 허들을 넘고 넘어 스스로 현관 밖으로 나서는 또 다른 날까지, 나도 나를 응원하며 가만하게 기다린다. 또다시, 산책하는 삶을 위하여. 

심경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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