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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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직 아이였을 때, 지팡이를 짚은 꼬부랑 할머니와 흰 수염이 지긋하게 난 할아버지를 보면서 노인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상념에 잠겼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른조차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노인의 삶이란,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하늘 위의 뜬구름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어찌됐든 간에 허리가 고사리처럼 구부정해서 거동이 쉽지 않을뿐더러 무슨 말을 해도 한 번에 알아듣기가 힘들었던 할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며 나이가 든다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서글픈 일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함께 살던 친할머니께서 어린 손주가 귀여워서 엉덩이를 토닥거리거나 품 안에 안으려고 할 때면 철부지였던 저는 할머니에게서 나던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싫어 요리조리 피했는데, 그런 제 행동이 못내 서운하셨던 할머니께서 울컥하시며 이렇게 말씀하곤 했습니다. “너희는 안 늙을 줄 아냐?”

할머니 말씀이 맞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꼬마 아이도 중년이 되었으니까요. 만물이 소생하고, 무성하게 잎과 꽃을 피우던 한여름의 들뜬 열기도 잦아들고, 풍성했던 황금빛 들판의 기쁨도 잠시, 이제는 적막함만이 감도는 쓸쓸한 겨울 들판을 가만 바라봅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겨울밤, 낙엽은 모두 지고 겨울바람은 유독 차기만 합니다. 이제 며칠 후면 중년의 나이에 숫자 하나가 더 보태지겠지요.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은 노년의 삶에 한 발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준비해야 할까요? 노년의 삶은 정말 외롭고 쓸쓸하기만 할까요?

 

흔히 우리가 접하는 대중매체에서 노화와 관련된 주제를 다룰 때면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노인들에 비해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한 연구에서는 30대와 70대 두 집단의 사람들에게 두 집단 중 어느 집단이 더 행복할 것 같은지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두 집단 모두 30대 사람들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집단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복 정도에 대해 묻자, 70대 응답자들이 30대 응답자들에 비해 행복 지수가 더 높게 측정되었습니다. 젊은 시절보다 노년의 삶이 행복감에서 더 멀어지거나 비참할 것이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입니다. 

젊었을 적에 노화에 대해 부정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나이가 들었을 때 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베카 레비 박사Dr. Becca Levy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노화에 대해 부정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 비해 늙어서 기억력이 더 좋지 않았으며, 청력 손실로 고통을 겪을 가능성도 더 높았습니다. 또 노년기에 대한 기대가 낮았던 만큼 운동도 덜 했습니다. 노년기의 운동은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기를 보내는 데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노화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행복한 노년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가올 노년기를 준비하는 슬기로운 자세일 것입니다.

물론 노년기에는 각종 질병에 더욱 취약해지고, 신체적으로 노쇠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늙는다는 것이 불행하다거나 정신적으로도 약해진다는 것과 동의어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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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노년기 관련 연구에서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은 꽤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탠퍼드대학교의 로라 카스텐센Laura Carstensen 교수와 그 동료들이 제시한 이 이론에서는 젊은이들이 정보를 습득하고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집중하는 것과 달리,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지금 이 순간, 긍정적인 것, 정서적인 정보에 집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은 노인들은 삶에 대한 조망을 바꿔서 보다 현재 지향적이고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 위주로 우선순위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관계나 긍정적인 면들에 더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게 되고, 바로 이러한 삶의 태도가 노인들을 이전보다 더 행복으로 이끈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이렇듯 노년기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긍정적이고 행복감 수준이 높은 것으로 기대되지만, 배우자나 친한 친구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충격적인 이별을 경험하거나 경제적 어려움, 치매 발생의 가능성 및 가족들의 관심과 지지 부족 등으로 깊은 슬픔과 외로움의 덫에 빠지기도 합니다. 

2016년도에 방영된 TV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는 노년기의 삶을 현실적이고도 유쾌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러 노년의 인물들은 고요히 창가에 앉아 지나온 삶을 곱씹기보다 지금껏 그랬듯 여전히 치열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옹골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차가운 겨울밤, 쓸쓸해 보이는 겨울 들판을 무심히 바라보던 저의 귓가에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살아 있다.”라고 외치는 황혼 청춘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겨울 들판은 치열했던 생장의 수선함을 거두고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고즈넉한 침묵과 넉넉한 품을 내어 주며 잠시, 쉬었다 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들판에 새싹이 돋아나면 그 가을에는 더 풍성한 가을걷이를 기대해 볼 수 있겠지요.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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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Lacey, H. P., Smith, D. M, & Ubel, P. A. (2006). Hope I die before I get old: Mispredicting happiness across the adult lifespan. 

2. Levy, B. R. (2009). Stereotype embodiment: A psychosocial approach to aging.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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