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아주편한병원, 장기중 전문의] 

 

‘자꾸 죽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잠시 눈을 감고 꿈을 복기하듯 숨을 고르다 이야기를 이어갔다.

'죽은 외삼촌, 언니, 아랫마을에 살았던 순례도 오고. 그러면서 나한테 자꾸 같이 가자고 해. 그렇다고 무서운 건 아니야. 그래도 예전에는 안 간다고 소리치고 싸우고 난리를 부리다 바로 꿈에서 깼는데... 요새는 좀 달라. 요새는 웃으면서 나도 그냥 따라가. 최근에는 엄마가 왔는데 내 손을 잡고 구비구비 산길을 따라가고 언덕 넘고 강을 건너는데 점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거야. 더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하니 뒤돌아 보면서 조용히 웃고 계신데 엄마 미소가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진 건 처음이야.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에 또 올 테니 오늘은 돌아가래. 계속 죽은 사람이 찾아오는 거 보면 내가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건가 봐.'

어느 날부터 할머니는 자주 반복되는 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당연히 환자가 이야기하는 반복되는 꿈이 있을 때 그 무의식적 상징과 해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맘 한 구석에도 '정말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올라왔다. 치매 초기이고 어디 몸이 아픈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그런 불안이 올라왔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도 같은 마음이 들었을 거다. 마음이 복잡해진다.

계속 마음속에 질문이 맴돌았다.

'할머니의 꿈은 할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초기 치매 단계 어르신들은 생각보다 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중에서도 많이 듣게 되는 내용 중 하나가 죽은 배우자, 가족, 친척 또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찾아오는 꿈이다.

물론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노인들도 죽은 사람에 대한 꿈을 꾼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주로 일시적으로 불안이 높거나, 돌아가신 사람에 대한 심한 죄책감, 그리움, 우울 등의 감정적 요인이 작용했거나, 삶의 큰 변화가 죽음이라는 상징으로 나타났을 때다.

그러나 같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치매 어르신의 꿈에서 전달되는 느낌은 '무언가'달랐다. 보통 죽은 사람이 나타나면 공포를 느끼거나 분노를 느끼는 등 강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반인들의 꿈과 달리 꿈을 이야기하는 치매 어르신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나를 잡아가려고 계속 꿈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나 사실 표정은 그리 무서워하지 않는다.

거기다 나에게 치매 노인의 꿈이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초기 치매 단계를 넘어 현실 능력 저하가 더 악화되는 중기 치매 단계가 되면 실제 꿈은 환각으로 바뀌어 돌아가신 배우자나 부모님, 가족이 눈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즉 앞으로 나타날 증상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필요했다.

 

최근 발표된 치매 환자의 꿈에 대한 연구를 찾아보면 꿈 내용 자체보다는 꿈과 관련된 렘수면의 변화가 치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특히 꿈에서의 행동을 그대로 표출하는 렘수면 행동장애(REM sleep behavior disorder) 환자의 경우 치매(특히 루이소체 치매 또는 파킨슨병 치매)에 잘 걸린다는 내용은 치매와 꿈의 관계와 관련해서 잘 알려진 연구다. 그 외에도 치매와 꿈에 대한 연구들은 꿈이 생생한 정도(vivid dream), 꿈의 기억 여부(dream recall)가 치매 발생에 미치는 영향 같은 내용이 주로 다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서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한동안 고민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죽은 사람이 찾아오는 꿈'을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꿈 이야기를 하던 그들의 표정과 내 진료실에서 보여줬던 치매 어르신의 표정도 겹쳐졌다.

내 기억이 머문 곳은 바로 암환자 병동이었다.

 

당시 나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암 환자들의 불면이나 섬망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 암병동에 협진 진료를 다녔다. 섬망 상태인 암환자들과는 대화가 어려웠지만 대화가 가능한 말기암 환자들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더 이상 통증이 없이 파란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고향 언덕에서 뒹굴고 뛰노는 꿈처럼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꿈도 있었고 어두운 빗속에 혼자 남아 공포에 휩싸이는 꿈처럼 죽음의 두려움이 지배하는 꿈도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꿈 내용이 바로 죽은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찾아와 자신을 이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꿈이었다. 한 환자는 꿈에서 깼는데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옆에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따라오느라 고생했다'라고 말해주는 신비한 체험을 하기도 했다.
 

사진_픽사베이


이런 현상을 완화의학에서는 ELDVs(End of Life Dreams and Visions)라 부른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들이 겪게 되는 꿈과 환상에 대한 경험이다. 숨을 거두기 전 빛이 쏟아지거나 터널을 지나가는 경험으로 잘 알려진 임사체험(NDE : Near Death Experience)과 달리 ELDVs 현상은 심장이 멈추기 직전이 아닌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지는 과정 중 경험하게 되는 꿈과 환각이다. 이는 병적인 상태도 아니고 섬망으로 인한 혼란 감도 아니다. 우리는 ELDVs 현상을 죽음의 과정(dying process)에서 만나게 된다.

그럼 죽음의 과정 중 ELDVs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뭘까? 그 질문에 대한 고민이 치매 할머니의 꿈에 대한 단서를 줄 것이라 생각했다.

 

2014년 완화의학저널 (Journal of palliative medicine)에 흥미로운 논문이 실렸다. 뉴욕 치크토와가 센터의 크리스토퍼 박사는 버펄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59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ELDVs 현상을 조사했다. 59명 환자 중 88%가 ELDVs 현상을 경험했고 그중 46%가 고인이 된 가족, 친척, 친구가 나오는 경험이었고 39%가 어딘가 돌아다니거나 그럴 준비를 하는 내용의 꿈(going or preparing to go somewhere)으로 보고 됐다.

연구에 참여한 88세 베리는 사망 28일 전 전혀 모르는 장소를 차로 운전하는 꿈을 꾸는 중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너는 착한 아들이란다. 사랑한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은 걸 이야기했다. 71세 다이애나는 사망 38일 전 고인이 된 어머니와 자신을 돌봐준 누이가 꿈에 나와 '내가 가르쳐 준 걸 기억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이에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크리스토퍼 박사는 ELDVs 경험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에 빠져있던 환자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안식을 얻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들은 꿈을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시 느끼고 꿈속에 돌아온 고인을 통해 다시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죽어가는 과정 중에 위안(comfort) 얻었다.

 

치매와 죽음 모두 자신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그들이 내 옆에서 먹고 자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치매 환자를 보며 바로 죽음을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치매에 걸렸다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된다. 특히 초기 치매 단계에서는 아직 나를 인지할 수 있고 나의 두려운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즉, '내가 내가 아닌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온전히 느끼게 된다. 그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과 같다. 그렇기에 위안이 필요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위안이 필요하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해 줄 수 없다. 그들이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는 눈빛은 내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을 상기시킬 뿐이다.

그때 꿈은 지금은 내 옆에 없지만 나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와주고 그들을 통해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다시 살아 돌아온 그들은 편안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하거나 목적지도 없이 나와 함께 여기저기 다닌다. 역설적으로 그들을 통해 내가 살아 있음을 다시 느끼고 나는 그들의 무조건적 사랑을 기억해내며 존재한다. 그렇게 할머니는 밤마다 위안을 얻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진_픽사베이

 

오늘도 곱게 꾸미고 내 진료실 의자에 앉는 할머니에게 물어본다.

‘할머니 오늘은 무슨 꿈을 꾸셨어?’

오늘은 더 이상 무의식적 상징도 해석도 중요하지 않다.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을 거다. 그냥 할머니가 꿈을 떠올리다 자신이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 작은 위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만 있을 뿐이다.

‘응, 자꾸 죽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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