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가까울수록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잘 모르거나 가깝지 않은 사이에서는 선을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서로 조심하며 예의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계가 가까울수록, 함께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상대방이 편해지는 만큼 적당한 선을 지키기가 어려워집니다. 상대방을 믿고 의지할 수 있어서, 혹은 상대방이 나를 그렇게 생각해서 한 행동이나 말들이 서로를 힘들게 하거나 관계를 망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합니다.

이렇게 적절한 선과 균형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상사나 동료들을 지나치게 배려하거나 그들의 욕구와 필요를 자신의 것보다 우선시하느라 자신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이거나 내 행동이 모두 잘못됐다는 듯이 나를 비난하는 사람과의 파괴적 관계 속에 나를 내버려 둘 때도 있습니다. 타인이 나의 시간과 물질, 노력, 감정을 내가 동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하면서 내 삶의 주도권을 내어주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모두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 두기, 건강한 경계(healthy boundary)를 지키는 데 실패했을 때 나타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내어주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가족이라면, 친구라면, 연인이라면... 등등. 다양한 타이틀로 정의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는 상대방과 동일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깁니다. 이런 마음은 가족 중심적 또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태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쳤을 때는 자신을 지키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의 욕구가 삶의 우선순위가 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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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경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 사이에 명확하고 건강한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생각하는 나, 내가 편안하게 여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나의 가치관과 신념, 내가 원하는 행동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알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준점을 갖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기준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경계를 그려 나가며 그 선을 타인이 허락 없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지속되었던 관계의 패턴을 그대로 이어 가며 자유롭게 선을 넘나들기를 원할 수 있는 것이지요.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내 삶에 대한 지분이나 소유권을 주장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소진되게 하고 반복적인 문제 상황에 계속 몰아넣는데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 안에서 언니가 동생을 계속 비난하며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해 왔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자매는 유년기부터 성인기까지 수십 년간 그런 관계 패턴을 지속해 왔고, 동생은 언니의 태도로 인해 항상 자신이 부족하고 어딘가 잘못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언니는 가족 중 맏손녀로서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았고, 아무도 언니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거나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족 분위기로 인해 동생은 자신이 언니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로부터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느꼈고, 자신을 가족의 골칫덩어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며 점차 동생은 그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며, 언니와의 파괴적 관계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로 그녀는 언니와의 교류를 줄여 나갔고, 예전에 가졌던 ‘가족이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라는 이상적 가족관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은 이런 변화를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그래도 가족인데. 그래도 자매인데. 내가 죽고 나면 너희 둘밖에 남지 않는데 서로 가깝게 지내야 한다.”라며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언니와의 관계가 자신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으로서는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하며 실천하고 있습니다. 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는 하면서, 언젠가 언니와의 관계가 더 성숙하고 건강한 관계로 변화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일 수 있겠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과 언니, 가족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_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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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위해서는 ‘자각’과 ‘용기’, ‘결단’, ‘실천’이 필요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타인을 위해 희생하거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혹시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인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간, 재정, 감정 등 다양한 영역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 영역이 중첩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그렇다면 해당 영역에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지 경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경계를 기준으로 기존의 관계나 앞으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변화의 과정이 한 번에 완성되지 않을 수도 있고, 시행착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저항이나 생각지 못한 변수에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변화는 일시적, 일회적인 것이 아니며, 삶에서 계속 이어지는 연속적인 학습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위한 용기와 결단을 갖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다 보면 어느새 건강한 거리 두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외로움은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의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어도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의 건강한 관계가 부재하고 경계를 지키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여전히 외로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건강한 거리 두기와 경계를 통해 좋은 사람들과 관계의 기쁨, 행복을 온전히 누리실 수 있기를, 자신의 경계를 지키며 타인의 경계 역시 존중하는 성숙한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우경수 원장

 

우경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강남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대구가톨릭대병원 의과대학 학사 , 석사
대구가톨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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