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수고도 내가 알아줘야 해

 

식물 잎의 순환은 대충 이러하다. 가지나 뿌리에서 잎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찢어진 잎이 될지, 무늬가 있을지를 유전적으로 형성한 후, 야들야들한 새 잎이 생겨난다. 다른 잎보다 색이 연한 야들한 잎이 햇빛을 받고 바람을 스쳐 진한 색의 어른 잎이 된 후, 열심히 광합성을 한다. 자신의 건강함과 새 잎을 내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을 친다. 그렇게 오랫동안 새 잎이 어른잎이 되고, 할 일을 열심히 하면 시간이 지나 헌 잎이 된다. 누가 봐도 거칠고 열심히 살아온 잎의 모습이다. 그 잎이 떠나가려면 영양분을 빼앗겨 점점 노란색을 띄게 된다. 완연히 노란 색으로 변하면 그때부터는 팽팽하던 잎이 주룩, 힘을 잃는다. 보통 이렇게 나이든 잎을 ‘하엽’이라고 부른다. 

하엽은 식물이 건강하지 않거나 병충해에 시달려도 생길 수 있다. 그때는 잎에 자국이 나거나, 알맞은 속도(앞에 난 잎보다 빠르게)보다 빠르게 노란색으로 변해, 금새 알아챌 수 있다. 이를 제외한 건실히 일한 잎이 하엽이 되면, 나는 무조건 수고했다고 한 번쯤은 말해 주고 가위로 잘라주는 행위를 한다. 식물이 지탱되기 위해서는 잎이 거즘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잎이라는 게 당연히 예쁘게 나서, 열심히 일하다가 당연히 하엽의 순서로 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힘껏 성실하게 펼쳐지는 새 잎
힘껏 성실하게 펼쳐지는 새 잎

 

잎이 나는 시기에 물이 부족하거나 병에 시달리거나, 공간이 마뜩잖으면, 잎이 쭈그러들어 나오거나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썩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 위기를 열심히 이겨내고, 신기하게 찢어진 잎까지 다 만들어진 상태로 돌돌 말려 있는 잎들이 펴지는 광경을 보고 있자면, 생명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건강히 일하다 하엽이 된 잎에 수고했다는 마음을 꼭 전한다. 평소처럼 잎이 나고, 평소처럼 잎이 지는 일상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정말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잎이 새로 나는 시기에는 자주 지켜보며 조금 물을 더 자주 준다. 나만의 응원 방법이다. 잎에 분무를 해 줘서 잘 펼쳐지게 돕기도 하는데, 보통의 경우 그저 물을 조금 더 자주 주고 식물 등을 더 가까이 대 준다. 

어느 날 부터인지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이 대견하다는 생각을 거듭해서 했다. 일정한 일을 반복해서 하는 일을 끔찍하게도 못하는 내가 일을 하겠답시고 자꾸 의자에 나를 앉히고 자꾸 컴퓨터를 켜곤 한다. 정말이지 내가 가장 못하는 일은, 내키지 않는 컨디션에 가만히 앉아 점잖게 글을 쓰려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도 앉아 있는 것 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매주 나는 글을 완성하고, 여러가지 스케쥴을 조율하고, 어떻게든 그 일정을 소화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한 주씩, 완성하다 보면 어떤 주에는 술술 글이 쓰이기도 하고, 어떤 주에는 죽어도 글이 안 나오는 날이 있다. 그러다 슬럼프 비슷하게, 나의 글은 멈추고, 퇴보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작은 슬럼프를 건너면 나는 다시 오랫동안 힘을 내야한다. 식물의 잎이 생기는 과정처럼, 내 안에서 나를 쥐어짜고, 봐주지도 않고, 무조건 시간을 들여 앉아 쓴다. 이렇게 앉아서 계속 쓰다 보면 어느 날인가는 새 잎이 펼쳐지듯이 어떤 글이 생겨난다. 신기하다. 

그렇게 앉혀 놓고, 억지로라도 쓰고, 못 쓸 글이라고 지워 버리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내가 나를 극복하려는 모습을 목격하곤 한다. 비록 지금 나의 글이, 정신이 온전히 못할 수준이라 해도 나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기특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하엽에게는 매번 “수고 정말 많았어.”라며 말을 건네던 내가 스스로 작은 슬럼프를 건너뛰고 짧은 글이라도 완성한 날에는 사실상 ‘기특, 수고’보다 ‘신기하네, 이게 이렇게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더 들었던 것이다. 

 

할 일을 모두 마친 하엽
할 일을 모두 마친 하엽
할 일을 모두 마친 하엽
할 일을 모두 마친 하엽
할 일을 모두 마친 하엽
할 일을 모두 마친 하엽

 

나의 하엽은 누가 알아줄까. 어른이 되어서 가장 결핍되는 부분은 ‘칭찬’이다. 걷기만 해도, 일기만 매일 써도 칭찬받던 시절은 끝나 버리고, 어른이 되면 그 모든 것은 선택이고 당연한 자기계발이 되어 버린다. 내 수고는 누구도 ‘칭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자처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한 일이 그럴싸하다, 수고했다 싶으면 거침없이 나 스스로에게 칭찬을 퍼붓는 것이다. 내 노고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이게 잘 쓴 글인지, 읽을 만한지, 통째로 버려야 하는 글인지를 파악하고 다시 쓰거나 보완하는 일들을 하고 나면, 수고가 느껴진다. 약간의 고단함은 덤이다. 그때 나라도 칭찬을 분명히 해 보자. 누구에게 억지로 인정받으려고 남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는 것 보다,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낫다고, 어제의 글보다 오늘 글이 조금 더 읽을 만하다고 칭찬하는 것. 

중간중간 나에게 생기는 하엽을 내가 알아채자. 엉터리일지라도 그것을 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내가 가장 잘 알기에, 나 스스로의 인정이 가장 필요하다. 부족하면 채찍질할 것이 뻔한데, 잘 해내도 수고에 대한 인정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무엇을 위해 성실한 것인가. 나에게 바로 알려줘야 한다. 넌 지금 충분히 잘 해냈다고, 너의 수고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거라고. 비난과 교정은 남의 몫일지언정 응원과 칭찬은 오롯이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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