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는 나만의 방법 (2)

 

식물의 수명은 계산되지 않는다. 보통의 우리는 주택이나 아파트에 살고, 그 공간은 한정적이며, 식물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천장에 닿기도 전에, 큰 나무는 길 밖에 유기하거나 판매한다. 성의 있는 자는 전정(剪定: 나뭇가지를 잘라 주는 일. 세부 가지를 잘라 주거나 솎아 주는 것)을 해 준다.

실제로 나는 오래전부터 ‘휘커스 움베르타’라는 식물을 멋지게 키우다가 베란다 천장에 닿아서 새로운 잎이 휘어지며 크는 것을 보고, 올 봄에 큰 마음먹고, 정말이지 큰 마음먹고 잘라 냈다. 꽤 많이 잘려 나갔는데, 지금 휘커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자라난 가지와 잎들로 휘황찬란해졌다. 식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모두 사람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전정을 해 줄지 유기를 할지, 물과 빛, 영양분을 주며 열심히 키울지, 게으르게 변해 소중히 다루지 않을지…, 이 모든 행위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물의 수명은 일반적인 기대수명이 있지만, 절대적으로는 사람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단단한 가지를 잘라 냈는데, 올 여름 수많은 잎을 낸 휘커스 움베르타
단단한 가지를 잘라 냈는데, 올 여름 수많은 잎을 낸 휘커스 움베르타

 

물론 식물을 잘 다루지 못해서 죽이는 경우도 꽤 많다. 물을 너무 자주 줘서 뿌리가 썩었거나, 알맞은 환경에 놓아 주지 않아서 빛이 부족하거나 바람이 없어 죽기도 한다. 때로는 억울하게도 해충이나 병에 걸려 죽는 경우도 왕왕 있다.

운이 좋게도 식물을 처음 좋아해서 들인 식물들 중에 지금까지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식물이 몇 있다. 우선 그 옛날, 아무것도 모르고 식물 가게에 들어가서 개업 선물로 자주 이용되는 지극히 평범한 ‘고무나무’ 한 그루를 들였다. 큰 나무를 들이고 싶었는데, 마침 오피스텔 1층에 식물 가게가 있었다. 그 누가 봐도 개업식 선물로 심겨진 고무나무는 여기저기 잘린 자국이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정상이지만, 그때의 나는 독립했다는 기쁨과 초보적인 식물 지식으로 이 점이 이상하다는 생각보다 “드디어 큰 나무 생겼다!” 하고 기뻐하기에 바빴다.

실내에서 자라는 나무는 시한부로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식물등과 공기순환기와 물을 열심히 줘도 나무가 실내에서 자라면 시한부가 된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에 반쯤 동의한다. 처음에 ‘시한부’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읽고 마침 늙어서, 잎도 잘 나지 않는 고무나무를 이미 다 죽어 가는 나무 취급했다. 그러나 가을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고무나무는 보란 듯이 잎을 냈다. 작고 볼품없지만 나름 최선을 다한 것일 게다. 나는 그 노력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수년간 나와 살며, 나의 변덕스러운 물 주기와 드문 영양제, 매일 켜지지만 아주 가깝지는 않은 식물등과 열심히 불어 대는 공기순환기에 적응하고 최선을 다하여 잎을 내고 있다는 것이 마음 어딘가를 쿡 찔렀다. 그랬다. 나는 큰 줄로만 알았지만 다시 옮겨 심으니 생각보다 훨씬 작았던 늙은 고무에게 감명을 받고 말았다.

내가 만약 시한부라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최선이 아닌 환경에서 나는 최선을 다할 수 있었을까? 그저 불안한 이 삶 속에서 중심을 잡고 서는 것도 마치 한 발로 서는 요가동작만 같은데…, 내가 작은 잎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내놓을 수 있었을까?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회의적인 답을 내놓고 한참을 고무나무만 바라봤다. 그래, 너에게 시한부라는 말은 내가 붙였지. 네가 그렇다고 낌새를 준 게 아니잖아. 난 너를 더 믿어 볼래. 나의 깊은 우울도, 과수면도, 눈물도, 그 사이마다 가득채운 한숨들도 모두 지켜봐 준 고무나무. 이 나무의 앞날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괜스레 고무나무에 생기가 도는 것만 같다.

 

나와 함께 일상을, 일생을 함께하고 있는 고무나무
나와 함께 일상을, 일생을 함께하고 있는 고무나무

 

사람도 귀한 사람이 곁에서 나에게 기회를 주면 생기가 난다. 날 믿어 주고,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 줄 생각을 하면 일편 부담스럽지만 그보다 더 기쁘다. 나에겐 커다란 나 자신에 대한 인정 욕구가 있어,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이 내 눈앞에 어른거리면 금새 불안해지고 기분이 다운된다. 완벽함이라는 답이 없는 작업에서도 나는 완벽하길 바란다. 실력은 그 꼬투리를 잡을 여력조차 없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다시 나는 나에게 완벽함을 바란다. 과연 불안은 나를 떠나고, 나 자신은 한 발로도 어깨 쭉 펴고 서 있을 수 있을까?

나의 정신 상태와 글쓰기 능력이 완벽에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완벽해질 수는 없다. 그것은 애초에 기대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내 곁에 한 해, 두 해 지나며 나를 지켜가는 나무들을 나또한 지켜보려 한다. 잎이 조금 작아져도, 생기가 전처럼 없어도,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자 한다. 오늘도 한 발로 서 보는 나에게처럼.

 

밑부분에 식물등에 탄 부분이 있지만, 열심히 커 올라가는 치아펜스
밑부분에 식물등에 탄 부분이 있지만, 열심히 커 올라가는 치아펜스
몬스테라 토에리. 달력 옆에 항상 같이 있어 시간 가는 것이 가장 실감나는 나무
몬스테라 토에리. 달력 옆에 항상 같이 있어 시간 가는 것이 가장 실감나는 나무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