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간의 믿음이란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얇은 습자지 같은 불투명하고도 큰 종이가 날 둘러싼 것이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표정이나 행동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아도 그저 믿는 것이다. 그냥 믿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지 않을까, 어렴풋하게 짐작해 본다. 

괜히 잘 자라 줄 것으로 믿는 식물들이 있다. 어느 때는 싱고니움이 그랬고, 그 언젠가는 몬스테라가 그랬고, 또 언제는 파스타짜넘이 그랬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식물은 그냥 모두 다 잘 자라는 거 아닌가 하는 막연한 신뢰?(어리석은 지식 정도로 갈무리 하자)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당연한’것은 없었다. 모든 것에는 이유와 대가가 있었고, 얼마간의 비용을 꼭 치루고 또 이런저런 명분이 있어야지만 굴러 가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였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당연히 가을이 오는 것 같지만, 우리가 발을 동동 굴려 하루를, 하루씩을 채워 나가지 않으면 그 하루는 공허할 뿐 채워져 있지 않은 채 둥둥 떠 있는 것처럼, 하루를 살아가는 것도 보통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씩의 시간을 발을 뜨겁게 동동 구르며 채워 나가면 그렇게 또 다음 계절이 오고, 시간이라는 것이 지나고, 불공평한 세상은 당연하게 지난다.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지만, 시간이 지나는 데만큼 불공평한 것이 없다. 누구나 24시간 7일 365일을 가진 것 처럼 보이지만, 누구의 24시간은 셀 수 없이 많은 돈의 힘을 빌려 타인의 힘을 빌릴 수 있다. 우리가 하기 힘들지만, 도움만 받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확실히 해야 하는 일들, 청소나 설거지, 장소 이동과 식사 운동 등등 누구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불려 둔 쌀로 밥을 짓는 것부터 시작하는 일을 누군가는 그보다 두어 시간 더 늦게 일어나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해도 되는 삶을 산다. 아침은 다른 누군가가 돈의 힘으로 대신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저녁 밤까지 쭉 이어서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어쩐지 쓰기 싫다는 마음도 한구석에서 치밀고 올라온다. 왠지 앞 순서인 나를 대신한 대타자가 너무 안쓰러워지는 것이 구질구질해질까 봐서다. 

 

 

삶에는 어쨌든 어느 만큼의 비용이 꾸준히 발생하고, 우리는 그것을 메꾸며 살아야 한다. 식물을 품으면서도 마찬가지다. 초반에 구입 비용은 그저 자동차로 비유하면 구매 비용일 뿐이다. 물론 자동차마다 식물마다 차이가 많다. 비싼 자동차는, 식물은,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비싼 자동차가 고급유를 먹고 돌아다니고, 비싼 식물은 고급 영양제를 드신다. (봄, 가을로) 꾸준히 맞춰 줘야 하는 환경 또한 자연광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햇살이 드는 공간이어야 좋다. 

내가 당연히, 잘 자랄 것이라 생각했던 식물들은 누구에게나 생육이 무난한 난이도의 식물인 경우가 많은데, 큰 병치레 없이 자라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다. 휘커스 움베르타, 기타 잎이 큰 관엽식물들…, 그런데 이 모든 식물은 대부분 베란다에 두었다.

그 어느 날, 반갑지 않은 ‘솜깍지’가 창궐하면서부터 말이다. 솜깍지의 1번 대상은 아랄리아였다. 이전부터 아랄리아 겹쳐지는 부분에 솜깍지를 몇 번 발견했지만, 면봉으로 짓이겨 몰살시켰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그다음 번 타자를 골랐다. 휘커스 움베르타였다. 잎도 넓고 잎 끝에 골목길처럼 괴는 구간이 있어 깍지가 끼기 좋은 구간이 있었다. 녀석들은 이 공간을 놓치지 않았고 잎 뒷면에 성실히 들러 붙었다. 성실하게 자라던 휘커스가 봄에 너무 길어서 한 번 크게 전정해 주면서 기세가 밀렸는지, 병에 취약해진 것이다. 한 번 기세를 퍼트리기 시작한 솜깍지는 잎이 넓은 어떤 식물이든 다 들러붙기 시작했다. 이때가 초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약을 사야지’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강아지가 두 마리 있기 때문에 최대한 약은 자제하고 싶었다. 그런데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러다 이불에도 솜깍지가 붙을 기세였다(그런 악몽을 꾸곤 했다).

늦은 봄, 나는 백기투항을 하고 종묘 약제상을 찾아 깍지벌레에 맞는 약을 한 통 샀다. 혹시 약을 딴 데 쓸까 하는 살벌한 눈길로 위아래로 훑었고 어느 나무에 쓸 건지를 꼼꼼히 물었다. 나도 하나에만 쓰면 좋았겠지만…, 울상이 다된 표정으로 대표 나무인 휘커스를 말하고 그저 말았다. 써 있는 용량으로 조제해서 94KF마스크를 쓰고 베란다 문을 닫고 전체적으로 꼼꼼히 4.5L를 썼다. 잔뜩 뿌리고 썼던 물통은 쭈그러트려 버리고 나는 바로 샤워실로 직행해서 꼼꼼히 샤워를 했다. 그렇게 주마다 6주쯤 지났을까? 베란다에 가득 돌았던 솜깍지벌레는 잦아들더니 잡혔다. 그렇게 2-3주가 지났을까? 실내에 응애벌레가 돌고 있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새 잎이며 헌 잎이며 슬며시 구옆이 되는데, 그 자리마다 응애벌레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좌절이었다. 멀쩡하던 거대 몬스테라조차도 응애 자국을 맞았다. 몬스테라에 응애자국이 맞으니까 아단소니 알보에 응애가 와서 다 잘라냈을 떄 보다도 충격을 받았다. ‘이 튼튼한 애가 응애를 맞았다고?’

 

 

불안증을 가진 사람에게 ‘식물을 믿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을 믿는 일’이란 또 무엇일까? 나는 요즘 두 가지 식물을 참 믿고 있다. 하나는 ‘안스리움 클라리네비움’, 다른 하나는 ‘필로덴드론 마요이’이다. 두 식물 모두 제 자리에서 아름다운 잎을 하나씩 내며 큰 문제 없이 병충해도 이겨 내며 지금껏 잘 버텨 주고 있다. 잘 버텨 주는 것 그 자체에 감동하며 하루하루 살고 있다. 물론 이 예쁜 애들도 언젠가 병에 걸리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휩싸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식물을 ‘신뢰’한다는 것이 인간의 일방적인 노력 같은 것이지만, 식물이 그만큼 그것에 보답할 때, 인간은 최선을 다하여 지켜 주고 싶은 것이다. 

사람과 불안증 환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불안증 환자는 갑작스런 변화를 어려워하지만, 나를 믿어 주는 사람에 대한 신뢰는 언제나 두텁게 지키려고 노력한다. 사실 관계라는 것이 불안증 환자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우선 믿는 것, 이상의 것을 해 줄 수가 없다. 그것이 불안증 환자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지키기 힘든 일이자, 지키고 싶어하는 것일 것이다. 내가 모든 불안증 환자를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지금 글을 쓰는 불안증 환자는 나를 믿어 주는 둘러싼 이들을 있는 껏 힘을 내 믿고 싶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싶다. 이것이 세상이 원래 이렇게 믿기 힘든 것인지, 내가 불안증을 갖고 있기에 병증으로 힘든 것인지 구분해 내고 싶다. 철두철미하게 믿던 관계라 믿었는데, ‘너, 노느라 안 했지. ㅎㅎㅎ’이런 소리나 들으면 힘이 쭉 빠진다. 사실 이런 말은 나로선 우울증을 길목에서 서성거리다가 그 지하로 푸욱 빠져드는 말이다. 그 땅 자체가 늪으로 변해 버려 어디까지가 끝인지도 모르는 채, 빠진다. 빠져든다. 

식물을 믿으련다. 사람을 믿는 일은 너무도 위험하고, 모험적이고, 변수가 많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다. 절망적인 마무리에 괜한 미안함이 든다. 지금 내 마음이 그냥 이러하다. 오늘의 오레우스를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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