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심금숙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당신은 박탈감에 씁쓸하고 쓸쓸하다. 그들은 잔치에 초대받아서 즐길 대로 즐기고 양 손에 선물 가방까지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초대받지도 못했고 양 손에 가진 것은 하나도 없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누구 하나 내가 초대받지도 선물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나는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나의 이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 이 괴로움을 누군가에게 토로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당신이 경험하는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괴롭고 서글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위로와 해명인데, 사람들은 나의 박탈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고 세상은 나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다. 모두 즐겁고 잘 살고 있는 가운데 나만 혼자 외로운 이 소외감은 박탈감에 동반된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익히 들어왔듯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본능적으로 타인에게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심히 고통스럽다. 즉, 외롭다. 긴 진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은 지금과 같은 사회적 뇌(social brain)를 가지게 되었고, ‘obligatorily gregarious (기본적으로 남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남을 생각하면서, 즉 영희와 철수가 진짜 연애를 하는지, 혜영이는 철민이에게 왜 화가 났는지, 경희는 어제 왜 나에게 그 말을 했는지, 현주는 어떤 사람인지…… 처럼 다른 사람들의 의도와 마음을 생각하면서 보낸다.

당신이 지난주 커피숍에서 친구나 동료와 재미있게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보라. 모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연예인 누가 누구와 사귄다거나 아는 누군가가 이혼을 했다는 식의 가십(gossip)이 거의 전부다. 여기에 특정인에 대한 험담을 서로 죽이 맞아서 한마음으로 했거나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동료가 직장에서 짤린 얘기라도 생생하게 오고 가면 커피 맛은 더 구수해지고 앞에 앉은 친구는 나의 절친이 된다. 

이렇듯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배제되지 않고 소속되고 싶은, 가능하면 ‘인싸’가 되고 싶은 본능을 가지고 있고, 이는 거의 사회적 생존과 직결되는 본능이다. 기차를 타고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면서, 아니면 꿈 속에서도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를 떠올리고 그 속마음을 궁금해한다. 이렇듯 우리 마음, 즉 우리 뇌가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할 정도로, 타인과 교감하고 적절하게 반응하여 집단 안에 안정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것은 생존, 또는 실존에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먼 옛날 야생에 살던 원시인들도 그랬고, 21세기 서울 도심 빌딩에서 일하는 샐러리맨도 그렇다. 그들은 모두 같은 인간(Homo Sapiens)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속감이나 연결됨이 위태로워지면 우리는 외로움(loneliness)을 느낀다. 이런 면에서 배고픔이나 추위처럼 외로움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우리 마음과 몸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음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지성인들이 인간이 동물들 중에서 현재와 같이 독보적인 지위를 갖게 된 것은 다수가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대규모로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남 얘기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본능이 현재 인간이 세상에서 누리는 권력의 핵심 이유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중요한 사회적 연결성이 충족되지 않을 때 느껴지는 소외감과 외로움은 그만큼 뼈아프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학교나 직장에서 나쁜 성적을 받거나 할 일이 많이 쌓인 상황보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아무도 나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모두가 외면하는 상황이 심리적으로는 더 고통스럽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심하게 외로웠던 사람은 굶주린 사람이 상한 음식을 게걸스럽게 삼키듯이, 사이비 종교나 파괴적인 연인 관계에 빠져들고,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렇게 자신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면, 미국에서 가끔 벌어지는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와 같이 ‘외로운 늑대’가 되어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의학에서도 외로움이 오래되면 심혈관질환 등 신제질환에 보다 잘 걸리고, 수명도 짧아지고, 우울증과 같은 정신과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진_ freepik
사진_ freepik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박탈감에 빠지기 전부터 당신은 외로운 사람이었고, 박탈감은 당신의 오래된 외로움을 드러냈을 따름이라는 점이다. 이건 무슨 이야기인가? 박탈감에 빠져서 외롭고 힘든 건데, 그 전부터 내가 외로웠다고? “아니요. 저는 전에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학생이었고, 노력한 만큼 늘 결과도 좋았어요. 주변 학생들은 나에게 호감이 있었고, 마음에 맞는 친구도 있었다구요!”라고 앞선 사례 2-B의 경수는 필자에게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래, 경수는 착하고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니, 경수의 말처럼 친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경수가 A대학에 와서 새롭게 친구를 사귀는 것이 힘들고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과 친구들이 경수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경수가 과 친구들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인가?

우선 어떤 사이를 친구라고 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친구는 친(親)한 사람으로 사전적 정의로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뜻한다. 대개의 경우 학창 시절 같이 공부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놀면 친구가 된다. 일상을 공유하며 생각과 감정을 나누면 우리는 친구가 되는데, 이런 면에서 사회적 계층이나 나이가 달라도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 외연적 조건에 차이가 있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조건을 넘어서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에서 주인공 백인 할머니가 자신의 흑인 운전기사의 손을 잡고 “당신이야말로... 내 친구예요. (You are my best friend.)”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피부색이나 주종 관계를 넘어서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 선의의 경쟁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 마음속의 친구는 나의 성취에 의미를 더해 주는 존재로 그래서 나에게 소중해야 한다. 만약, 공무원 시험을 함께 준비하던 친구가 혼자 시험에 합격하고 내가 불합격했다면 앞으로 혼자 또 수험생활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워질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합격에 분노하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친구를 교우의 관계인 ‘친구’로 생각하기보다는 이겨야 하는 상대인 경쟁자로 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만약, 당신이 마음속으로 친구와 비교하며 내가 더 우월하다고 은밀히 느끼고 있었다면, 친구의 합격 소식은 당신에게 은밀한 박탈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결국 당신의 친구는 ‘친구’로 불리는 경쟁자였고, 그는 나에게 패배감을 안겨 주는 대상인 것이다. 친한 사람에게 느끼는 박탈감이 시기(猜忌)나 질투와 같은 공격적인 감정으로 얼마나 자주 발전하는지, 그리고 둘 사이 관계가 얼마나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지는 주변을 조금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당신이 친한 사람에게 느낀 박탈감은 바로 당신이 ‘친구’ 또는 ‘지인’이라고 부르는 경쟁자에게 느끼는 우월감과 경쟁심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을 경쟁심으로 대할 때, 상대는 이미 내 편이 아니며 상대에게 강자로 군림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상대는 좋은 것들을 나와 함께 하는 친구가 될 수는 없다. 친구 때문에 박탈감에 빠진 당신은 그와 교우의 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던 것인가? 아니면 오래전부터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소외시키고 혼자 외롭게 경쟁하고 있었던 것인가? 

비록 당신이 경쟁심으로 늘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켰을지라도, 외로운 권력자가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서 스스로의 외로움을 어떤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쉽게 깨닫지 못하듯이 자신의 외로움을 감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인생이 계획대로 잘되고 있고 나는 남들보다 잘하고 있다고 느꼈을 수 있다. 타인의 인정, 좋은 성적, 원하는 대학 입학, 그리고 괜찮은 직장과 같은 욕망에 취해서 친구 관계를 거부하고 외로움을 택한 것은 바로 당신이다.

 

  • 연재 내용은 대부분 『내가 박탈감에 빠진 날: 박탈감에 빠진 누군가를 위한 책』 이라는 제목으로 2022년 교보문고 퍼플을 통해서 이미 자가출판 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심금숙 원장

심금숙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박사
KAIST CLINIC 연구부교수, 초빙교수
저서 <내가 박탈감에 빠진 날 : 박탈감에 빠진 누군가를 위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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