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힘을 보여주자.

 

언제부턴가 사탕처럼 달콤하고 솜털처럼 부드러운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사라진지 오래다. 자식들과 TV채널 선택문제로 다투턴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밀려나 자기 방에서 자살 기도를 했다는 황당한 사건도 있다. 자식에게 얻어맞아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도 있단다. 참으로 어이없는 세상이다.

 

나는 여기서 굳이 사내는 목이 말라도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우리 할머니의 말씀을 들먹일 생각은 없다. 다만 아버지의 강성이 약해져선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싶다. 아버지로서의 강한 이미지는 살아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모성과 강한 부성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위험에서도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줄 아버지, 그런 힘 있는 아버지가 집에 버티고 있으면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

 

사진 픽사베이

 

• 프렌디 대디도 위엄은 지켜야.

 

세간에는 '딸 바보 아빠'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런 아빠들의 고민 중 하나는 아이들과 어느 정도, 어떤 사이여야 하는가이다. 재롱둥이가 차츰 철이 들어가면 아버지는 이 문제를 놓고 상당한 고민을 한다. 언제까지 귀염둥이 취급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가정에 따라, 각자 품성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아버지의 위엄은 잘 보전되어야 한다.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는 '안 돼!'라고 단호하게 말해줘야 한다. 아이의 의사는 존중하면서 필요할 때는 분명하게 꾸짖어야 한다.

 

아버지의 부드러움은 등 뒤에서 보이지 않게 은근히 전달되어야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조명으로 치면 간접 조명이다. 보이지 않게 등 뒤에 감춰진 그 부드러움을 아이들이 찾아 느낄 때 감동을 느낀다. 정녕 아버지가 빛날 때는 그런 순간이다.

 

사진 픽사베이

 

• 내 아이를 믿어라.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아버지에게 아들은 언제나 아이요. 철부지다. 환갑 지난 아들에게 길조심 하라고 걱정하는 게 늙은 아비의 심경이다. 아무래도 미덥지가 않다. 경험도 없는 애가 덤벙대다 실수나 하지 않을까? 겁도 많고 소심한 아이라 어디에 내놓아도 안심이 안 된다. 이런 노파심이 아이를 과보호하는 원인이 된다. 그저 품안에 감싸고돈다. 이것이 아이들의 독립심을 저해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부모가 아이를 믿지 못하면 아이도 자신을 믿지 못한다. 부모가 불안한 빛을 보이면 아이도 덩달아 불안하다. 불안한 아이는 무슨 일이고 소신껏 해낼 수가 없다. 설령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해도 해볼 염두를 못낸다. 불안하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도 혼자서 해보질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믿어야 한다. 그 나이에 걸맞는 정도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너를 믿는다'는 확실한 부모의 소신이 아이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은 평소의 부모 태도에서 그리고 생활 전반에서 전달되어야 한다.

 

사진 픽사베이

 

• 자식은 제왕이 아니다.

 

한국 가정은 자식을 제왕 모시듯 한다. 오죽하면 '효부孝父', '효모孝母' 라는 말이 나왔을까? 아이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된다. 개망나니로 굶어도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저 귀엽기만 하다.

 

서구 가정에선 어림없는 일이다. 모든 가족에겐 각자가 맡은 일이 있다. 아이들에게도 나이에 맞게 주어진 책임부담이 있다. 우체통을 점검하는 일, 배달된 우유와 신문을 챙기는 일, 휴일엔 차를 닦는 일, 설거지를 돕는 일 등 각자가 맡은 책임이 있다. 이것은 가족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이다. 누구든 맡은 이상 군소리가 없다.

 

어릴 때부터 자기역할과 책임을 가르치는 일은 아버지의 일이다. 아버지가 먼저 나서야 한다. 집안일은 엄마에게 맡겨놓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이는 집안일이 자신의 일이라는 생각을 못 한다. 아버지니까 집안일을 돕는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 일이며, 우리 일이라는 생각으로 참여해야 아이도 저절로 따라온다.

 

혈연보다 계약관계를 중시하는 서구가정이 꼭 건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식이라는 이름 하나로 어떤 책임도 물어선 안 된다면 우리 가정도 건전한 것은 아니다.

 

사진 픽사베이

 

• 연약한 세대

 

불행히 동물원의 사자에겐 이가 없다. 사냥할 필요가 없다. 경계를 해야 할 필요조차 없으니 할 일이라곤 게으른 낮잠뿐이다. 모자라야 움직인다. 이것은 사람이라는 동물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간에게도 동기가 없으면 행동이 유발되지 않는다. 배가 고파야 먹을 걸 찾아 나서고, 성적인 욕구가 생겨야 이성을 찾게 된다. 따라서 움직이지 않고도 모든 게 충족된다면 활동할 필요가 없어진다.

 

모든 걸 다 갖추었으니 손에 넣으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또 손에 넣었다고 좋을 것도 없다. 한마디로 매사에 의욕이 없어진다. 부유층 부모라면 특히 경계할 일이다. 모든 걸 다 가져보고, 다 해봤으니 더 이상 이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세 발 자전거에 밤잠을 설쳤던 흥분도 이젠 만성이 되어 자동차를 사줘도 시큰둥이다. 제주도만 가도 흥분했던 아이가 이젠 미국, 유럽 여행도 시큰둥이다. 이것이 풍요가 주는 비극이다.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다간 자칫 의욕을 상실케 하고 감동도, 기력도 없는 아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살게 될수록 우리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일들은 줄어들고 있다. 잘 살게 될수록 요구 수준이 높아진다. 그리고 그마저 다 충족이 되면 다음에 오는 건 권태요, 무감동이다.

 

 

‘아빠 그렇게 키워선 안 됩니다’ 중에서

 

 

이시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의학신문 고문
경북대학교 의학 학사
예일대학교 대학원 신경정신과학 박사
세로토닌 문화 원장, 힐리언스 선마을 촌장,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 원장
정신의학신문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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