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처투성이였던 그 시절의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2) 정신의 관성, 우리는 하던 대로 하고 싶어한다. -두 번째 불행

정신의학신문|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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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불행, 자신의 관계의 패턴을 변화시키는 것을 두렵게 만듭니다.

인간은 참 비합리적인 동물입니다. 멀리 돌아서 가는 낯선 천국에 가느니 눈 앞에 있는 익숙한 지옥으로 가려는 경향마저 있지요. 우리가 무언가에 한 번 익숙해지고 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변화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심지어 지금 이 상황이 고통스럽더라도 말이죠. 의학적으로 항상성을 의미하는 ‘호메오스타시스’의 변형된 개념인 ‘알로스타시스’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오랫도록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스트레스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의 뇌는 정상의 기준을 변화시켜 적응한다는 개념입니다.

우리는 TV에서 같은 인간인데 다른 인간에게 종속돼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봅니다. 돈을 받지 못하고 일을 하면서도 그 곳에서 나오려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동거인에게 심한 폭력을 당하면서 돈을 갈취당하면서도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도요. 간혹 이 사람들이 운 좋게도 사회에 발견돼서 경찰이 이들을 학대자에게 분리하려고 하면 이 사람들이 오히려 경찰을 두려워하면서 강하게 저항하곤 합니다. 슬프게도 오랫동안 종속된 이분들의 정신세계에서는 ‘알로스타시스’가 형성됐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뇌에서는 학대당하고 갈취당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는 아무리 힘든 대인관계라 하더라도 그 대인관계의 패턴을 벗어나거나 변화시키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뇌가 평소의 루틴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상이나 위기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글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과의 관계의 집합이라는 것을 배웠고, 이번 시간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반복해온 관계패턴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파악하기 힘들고, 그 관계에서 벗어나기도 힘들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형성된 나의 관계패턴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분명히 방법은 있습니다. 가장 확실하고 널리 인정받는 방법은 기억의 포맷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즉 습관이나 무의식 등의 비언어적, 절차적 기억을 삽화성 기억과 작업기억 등의 의식적, 언어적 기능의 포맷으로 변경함을 의미합니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정신의 관성에 대해서 야구선수의 예를 들어서 알아보았습니다. 만일 어떤 야구 선수가 그 동안 수 천반, 수 만번 이 타격폼로 공을 때렸는데, 어느 순간 공이 잘 안맞고 경기가 안풀리기 시작하면 야구선수들이 반드시 시행하는 훈련이 있습니다. 타격폼을 교정 훈련입니다. 타격폼을 교정할 때에는 다음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타격폼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카메라, 그리고 두 번째로는 여러 사람을 교육해본, 타격폼에 대한 객관적인 조언을 줄 수 있는 코치와 같은 제 삼자의 개입니다.

아까 말한 타격폼, 우리로 치면 대인관계의 패턴. 이런 것들을 뇌과학에서는 절차적 기억이라고 부릅니다. 말로 할 수는 없는데, 우리의 뇌와 몸에 새겨져 특정 상황이 오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이 패턴. 이 패턴을 다시 조정하는 모드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신의 대인관계 패턴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제 삼자의 시각에서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패턴으로 하는지, 그리고 어떤 패턴이 나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불행하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는지를 말이죠.

고전적 정신분석에서는 이 개념을 무의식의 의식화로 떠올린다고 했고, 뇌과학적으로는 이것을 절차기억을 삽화성 기억과 작업기억으로 변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계 속에서 굳어져 습관과 관성이 된 자동화된 패턴을 재프로그램하는 과정입니다.

물론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지우고 다시 배울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관계로 인해 발생한 많은 불행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은 존재합니다. 불행한 관계는 우리의 정신에 어떤 패턴을 끼워넣습니다. 마치 바이러스가 자신의 유전 패턴을 숙주의 신체에 끼워넣는 것처럼요. 한 번 이 패턴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관성으로 인해 불행하면서도 불행인지 모르고, 자신의 인생에서의 문제의 어디서 부터가 나로 비롯된 것이고, 어디부터가 다른 사람으로 인한 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나쁜 패턴을 주입하는 관계를 저는 개인적으로 독이 되는 관계, 즉 ‘독성관계’라고 부릅니다.

불행한 관계는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우리의 정신을 불행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행으로 이어지는 선택을 계속하게 만들죠. 여기서 우리가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불행한 상태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쯤, 늘 지속하던 관성을 멈추고, 우리 주변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이 되는 관계가 있다(1)에서 계속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권 순 재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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