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10)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외로움 – 인생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
: 정호승의 ‘수선화에게’

 

환자들을 진료하다 보면 외로움과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 외롭다 느껴지기도 하고, 있기는 있지만 그럼에도 외롭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아주 일부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외롭고 싶지 않습니다. 그 감정은 참 쓸쓸하고, 비어버린 느낌이죠. 나만 외로운 사람이라고 느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 곁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고, 견뎌야 하죠.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시입니다. 워낙 잘 알려진 시라서 전문을 외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여기까지는 입에서 줄줄 나오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시인은 사람의 특징이 외로움에 있다고 합니다. 외롭지 않으면,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나 배움이 적은 사람이나, 가진 게 많은 사람이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이나 외롭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울 필요는 없습니다. 종일 전화 한 통 오지 않고, 문자 메시지 하나 없더라도 힘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나없이 다들 외로운 까닭입니다.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덕담이 “꽃길만 걸어가라.”입니다. 입학하는 학생에게, 졸업하는 사회 초년생에게,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에게 이런 덕담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꽃길만 걷는 인생은 없습니다. 설령 꽃길만 걸어가는 인생이 있다 해도, 그가 과연 행복할까요? 가시밭길, 모래사막, 협곡, 개여울을 지나는 동안 가끔 꽃길이 등장해야 감격하고 행복한 법입니다. 시종일관 꽃길이라면 감격할 일도 행복할 일도 없겠죠. 시인은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고 합니다. 눈도 맞고 비도 맞으며 가는 게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닙니다. 갈대숲에서 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갯벌이나 습지에 서식하는 작은 도요새입니다. 나도 외롭고 새도 외롭습니다. 또 있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도 외롭고 하느님도 외롭습니다. 신이 외롭다니 좀 이상하죠? 신도 외롭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두 번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전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왔을 때였습니다. 죽음과 멸망이라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극단의 상황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도 웁니다. 시인은 이를 외로워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도 자연도 신도 외로운 존재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사진_픽사베이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그러고 보니 천지에 다 외로운 것들뿐입니다. 새들도, 산 그림자도, 종소리도 외롭습니다. 그래서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서로 외로움을 달래고, 매일 해 질 녘 산 그림자가 마을로 내려와 외로움을 달래며, 종소리도 사방으로 한없이 울려 퍼지면서 외로움을 달랩니다.

수선화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자신을 향한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수선화는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지만, 추위를 잘 견디는 강인한 꽃입니다. 수선(水仙)은 물에 사는 선녀 혹은 신선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같은 알뿌리식물이라도 튤립은 화려한 이미지인 반면에 수선화는 청초한 느낌입니다. 물가에 핀 흰색 또는 노란색 수선화를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깨끗이 정화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제주도에서는 설중화(雪中花)라고도 불린답니다. 눈이 오는 겨울에도 피어나는 꽃이라 그렇다는군요.

 

시인은 왜 수선화를 보면서 시를 썼을까요? 수선화를 향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요? 수선화는 나르시스라고도 불립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나르키소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님프 리리오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름다운 소년으로 성장한 그는 워낙 눈부시게 잘생긴 탓에 많은 청년과 소녀들의 애간장을 녹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도도해서 누구의 사랑도 허락하지 않았죠. 모두가 그를 갈망하지만 아무도 그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요정 에코도 그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나르키소스로부터 차디찬 거절을 당합니다. 슬픔에 빠진 에코는 동굴 속에 숨어 울기만 하다가 몸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죠.

이 소식을 들은 요정들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찾아가 나르키소스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고통을 알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네메시스는 나르키소스에게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벌을 주었어요. 그는 어느 날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끊임없이 사랑을 구했지만, 상대는 답이 없었죠. 대답 없는 사랑에 지친 그는 점점 야위어가다가 결국은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은 자리에 이름 모를 고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고 합니다. 그 꽃이 바로 수선화예요. 지나친 자기애를 뜻하는 말인 나르시시즘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혼자 애태우는 사랑도, 둘이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도,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도, 타인을 향한 사랑도, 강인해 보이는 사랑도, 연약해 보이는 사랑도 모두 외롭습니다. 수선화는 외로움의 상징이죠. 그래서 시인은 수선화를 보면서, 수선화를 향해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말한 겁니다. 삶이란 이토록 처절한 외로움을 견디는 일입니다.

 

미국의 교육 컨설팅 기업 페라지 그린라이트의 설립자이자 CEO인 키이스 페라지와 탈 라즈가 쓴 책 중에 『혼자 밥 먹지 마라(원제: Never Eat Alone)』라는 책이 있습니다.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혼자 밥 먹는 건 외롭고 처량해 보입니다.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그런데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1인 가구가 증가하는 겁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1인 가구는 전체 가구 중 23.9퍼센트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는 22.5퍼센트인 4인 가구를 앞지른 겁니다. 미혼, 비혼의 증가와 이혼, 사별의 증가로 ‘나 홀로 가구’가 가파르게 늘어난다는군요. 2035년에는 혼자 사는 가구가 둘 이상 사는 가구보다 많아질 거라는 전망까지 나오는 실정입니다.

 

2018년 영국 BBC가 전 세계 5만 5천 명을 대상으로 외로움에 관한 온라인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외로움에 대한 다섯 가지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이 많은 사람보다 젊은 사람이 외로움을 더 많이 느낀다는 겁니다. 75세 이상 노인 중에서는 27퍼센트가 자주 외롭다고 응답했지만, 16~24세 젊은이 중에서는 40퍼센트가 자주 외롭다고 응답했다는군요. 청년들이 외로움을 더 자주 느낀다는 건 뜻밖이죠.

두 번째는 외로움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41퍼센트였고, 자주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 중에서는 31퍼센트가 외로움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응답했답니다.

세 번째는 외로움과 사회성은 큰 연관이 없다고 합니다. 혼자 밥 먹는다고 사회성 없는 게 아니라는 거죠. 사회성이 좋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외로움을 느끼는 데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교적인 사람도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도 똑같이 외로움을 느낍니다.

네 번째는 외로움과 계절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네요. 흔히 생각하듯 더운 여름에는 외로움을 조금 느끼고, 추운 겨울에는 외로움을 많이 느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크리스마스에 홀로 남은 사람이나 여름휴가 때 홀로 남은 사람이나 외롭긴 마찬가지인 거죠.

다섯 번째는 외로움을 자주 느낄수록 사회적 공감 능력이 평균보다 높았다는 겁니다. 연구진은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조사했는데, 자주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여러 가지 사회적 고통에 더 많이 공감했다고 하는군요.

 

외로움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어린이도 외로움을 느끼고, 노인도 외로움을 느낍니다. 오히려 외로움을 오래 견뎌온 노인들보다 외로움을 견디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더 참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있고, 자식들이 있고, 부모 친척이 있고, 친구들과 이웃이 있어도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외로움이 끝나는 게 아니라 새롭게 시작됩니다. 존재론적 외로움이죠. 따라서 외로움은 그저 혼자서 견뎌내는 겁니다.

 

수선화의 꽃대는 정말 가느다랗습니다. 바람이 불면 곧 꺾어질 듯 이리저리 흔들리죠. 하지만 꺾이지 않고 추위를 견디며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외로워서 곧 쓰러질 것 같지만, 묵묵히 견디다 보면 겨울이 가고 봄이 옵니다. 내가 견뎌낸 세월만큼 내 꽃잎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외로움은 병이 아닙니다. 치유의 대상도 극복의 대상도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회적 공감 능력을 확대하는 촉매로 사용한다면 유익한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은 달콤한 한쪽 면과 외로운 한쪽 면이 붙어 있는 과일과 같습니다. 어느 쪽을 베어 물든 반드시 다른 한쪽까지 먹게 되어 있는 법이죠. 홀로 외롭다고 느낀다면, 나는 반대쪽을 먼저 베어 물었을 뿐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이제 남아있는 건 달콤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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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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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노력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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