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8)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자살에 대한 욕구 - 죽어도 되는 사람과 살아야만 하는 사람
: 신현림의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최근 한 언론 보도를 접한 뒤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동안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다. 집세도 안 나온다.”
“밥을 굶고 산다.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60년 동안 장사했는데 이런 건 처음이다. 죽지 못해 산다.”
“내일이면 죽을 것 같다. 정신적 공황상태다.”

서울의 남대문시장, 광장시장, 통인시장 등 재래시장을 둘러본 기자가 상인들을 인터뷰한 글이었습니다. 시장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손님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구동성으로 힘들어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 시장 골목을 지키며 살아온 노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한 할머니는 손주 같은 기자를 붙들고 이렇게 하소연했습니다.

“남대문시장이 600년이 넘었는디 텅텅 비었어요. 전쟁이 나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오.”

 

너무너무 힘들고 견디기 어려울 때 우리는 죽을 만큼 힘들다, 죽지 못해 산다,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이 말의 무게 중심은 뒤에 있습니다. 그 정도로 힘들고 어렵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생의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죠. 절대 죽어버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살률이 높은 나라입니다. 연령표준화자살률(OECD 표준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에서 1위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인의 사망 원인 1위는 암이고, 2위는 심장질환이며, 3위는 폐렴이었고, 4위는 뇌혈관질환이었습니다. 그다음 5위가 바로 자살입니다. 지난해 자살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1만 3799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37.8명꼴입니다.

연령대를 살펴보면 10~30대까지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70대 이상에서는 자살률이 오히려 낮아졌다고 하네요. 젊은이들의 자살이 왜 이렇게 늘어나는 걸까요? 10대는 입시 스트레스와 가정불화, 20대는 취업난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30대는 이혼 등 가정문제와 사회적 부적응 등이 주요 원인으로 꼽힙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얼마 전 새로운 작품을 출간한 어떤 소설가는 인터뷰를 통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 지금 변사체로 발견돼도 이상하지 않은, 자살할 이유가 30가지쯤 있는 사람이에요.”

작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살기 힘든 이유는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고통의 중심에 서 있다고 느끼거나, 환란의 거센 파도가 집어삼키고 있다고 여기거나, 어디에도 출구가 없는 터널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죽고 싶은 이유가 아마 수십, 수백 가지는 될 겁니다.

 

진료하다 보면,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른 살에도 제가 살아있는 게 그려지질 않아요. 그때 전 없을 것 같아요."

 

신현림 시인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서른 번째 생일날에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마흔 번째 생일날에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개구리가 셰익스피어를 이해할 수 없듯이
네가 나를 이해 못 하고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라는 구름 울타리가 있어 자살하지 않았다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하도 살기가 만만치 않아 과연 서른 번째 생일이 될 때까지 살 수 있을까 물음표를 던지며 하루하루 견뎌내다 보니 죽지 않고 살아서 서른 번째 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흔 번째 생일이 과연 오려나 싶게 어렵사리 하루하루 버티며 지내다 보니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아 마흔 번째 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사는 게 죽을 만큼 힘듭니다. 누구도 나의 슬픔과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국 나를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은 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온정입니다.

 

​사람처럼 키스하는 산비둘기 보며
인생이 신기하고 궁금해서 자살하지 않았다
커피 향과 따순 밥이 너무나 맛있어 자살하지 않았고
꽃과 나비와 해와 바람을 선물 받고
세상에 진 빚을 갚지 못해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시인이 자살하지 않은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유를 보면, 참 별 게 아닙니다. 비둘기, 커피, 밥, 꽃, 나비, 그리고 해와 바람.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가는 데는, 어쩌면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살아야만 하는 중요한 삶의 의미, 목적 이런 건 없거나 아직 잘 모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왜 살아가는지 물어보면, 그냥 사는 거지 정도의 대답이 대부분일 겁니다. 시인은 나를 둘러싼, 사소한 일상들에 관심을 두고, 감사함을 느끼려 애쓰면서 살았나 봅니다.

 

자식을 키워야 해서 자살하지 않았고
쓸쓸한 나와 같은 너를 찾아
슬픔에 목메며
슬픔의 끝장을 보려고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시인에게는 예쁜 딸이 있습니다. 이제는 죽지 않아야 할 좀 더 적극적인 이유가 생겼습니다. 자식이 눈에 밟혀서이기도 하지만, 내 죽음이 자식에게 가져다줄 슬픔과 고통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정말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죽을 수 없습니다. 내 극단적 선택이 부모 가슴에 씻을 수 없는 대못을 박고,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되리라는 걸 생각하면 도무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지만,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생겼기에 시인은 전의를 불태웁니다. 나를 쓸쓸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슬픔에 목메게 한 너와 끝장을 볼 작정이라서 이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오기가 생긴 겁니다. 오기는 생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이런 이유로 시인은 지금도 잘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2017년에 펴낸 『반지하 앨리스』라는 시집에 실려 있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오랜 기간 반지하 집에 살았습니다. 낮에나 겨우 한 조각 햇살이 손님처럼 찾아드는 어둡고, 고단한 공간이죠. 토끼 굴에 빠져든 백 년 전의 앨리스처럼 시인은 돈에 쫓겨 반지하로 들어간 앨리스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도 시인은 딸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살아가는 즐거움과 행복은 환경에 좌우되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시인은 본인 스스로 즐거움과 행복을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품고 있기에 유쾌하게 웃으면서 삽니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무서운 겁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회피하며 살아갑니다. 젊어서부터 하루하루 지내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내가 매일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일은 별로 없죠. 평상시라면 선택지에 없어야 할 자살이, 내 선택지로 들어왔다는 건,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절망감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병적 상태, 즉 우울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겁니다. 나의 나약함도 아니며, 나의 결함도 아니고, 자살만이 답인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닙니다. 내 모든 생각이 그 선택지만을 향하도록 하는 우울증이 본질일 수 있습니다. 내가 수시로 자살을 선택지에 올려놓고 고민하고 있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진료를 권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개구리가 셰익스피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이라 느껴지더라도, 구름 같은 울타리로 우리가 되어 끝장을 같이 견뎌 나가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엊그제 세상을 떠난 삼성 이건희 회장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세상 최고의 부자도 빈 몸으로 떠나는 게 인생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학자도 저승길에 책 한 권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삶에 대한 대단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주변을 스쳐 가는 사소한 소중함을 붙잡고 살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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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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