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환의 <시(詩)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9)

[정신의학신문 : 여의도 힐 정신과, 황인환 전문의] 

 

자기기만 – 이건 꿈일 거야,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
: 괴테의 ‘자기기만’

 

지금 세상에서 가장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다른 사람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내가 겪는 아픔의 크기에 비할 수 없기에 바로 나라고 대답하고 싶은 분이 많을 겁니다. 그렇지만 조금 더 폭넓게 생각한다면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나요?

네, 그렇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그는 얼마 전 치러진 미국 제4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 바이든 후보에게 패배했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당선이 확정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개표 결과 바이든 후보의 승리와 트럼프 후보의 패배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예로 보아 이쯤 되면 패자가 자신의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승자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기자회견을 하게 마련입니다. 패자가 승자에게 전화를 걸어 축하 인사를 전하는 것도 흔히 보던 선거 후의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현직 미국 대통령임에도 투표에 부정이 있었다느니, 개표가 조작되었다느니, 사실상 자신이 승리한 선거라느니 하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패배 선언은 물론 승자에게 보내는 축하 메시지 전달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해 각종 소송전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투표와 개표 전 과정을 불신하고 있는 그는 법원의 판단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는 듯합니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이번 선거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불미스럽고 혼란스러운 선거로 기록될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왜 저러는 걸까요? 정말 선거에 조작과 부정이 있었다고 믿는 걸까요?

정치적으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아마도 그는 자기기만에 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기만(自己欺瞞, Self Deception)이란 사실과 다르거나 진실이 아닌 것을 합리화하면서 사실로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데도 자기에게 유리하거나 자기 마음에 들기 때문에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죠.

자기기만은 자신이 믿고자 하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소망을 기반으로 합니다. 따라서 이를 반박하는 명확한 증거가 나와도 쉽게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신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댄 사람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이를 자신에게 세뇌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자기기만을 생존 본능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상대방을 좀 더 잘 속이고, 중요한 정보를 적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자기기만이 일어난다고 보는 겁니다. 상대를 잘 속이면서 내가 가진 고급 정보는 노출하지 않은 채 상대가 가진 고급 정보를 캐내려면 표정은 여유롭지만, 머릿속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가슴도 두근거리겠죠. 이 모든 걸 태연하게 해내려면 여간 강심장이 아닐 겁니다. 만약 상대방에게 노출하지 말아야 할 핵심 정보를 노출함으로써 불이익을 당하거나 손해를 본 경험이 있다면 다음에는 상대방을 더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자기기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 상태가 이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패배를 도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잃을 것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죠. 진실을 인정하게 되면 맞닥뜨리게 될 현실이 공포와 불안과 초조, 아마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사진_KBS뉴스

 

자기기만은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남의 물건을 훔치다 걸려 선생님이 어머니를 오시라 해서 상담합니다.
“선생님, 우리 애는 절대로 그런 짓 할 애가 아니에요.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겁니다.”
대부분 어머니가 자기 아이가 도둑질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을 못 하는 겁니다.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와 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환자의 건강을 위해 금연을 당부하면 상당수 환자가 비슷한 대답을 합니다.
“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담배를 끊을 수가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환자 대부분이 금연이 실패합니다. 자기도 자기를 모르는 거죠.

알코올 중독 환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 술은 약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절대 알코올 중독 환자가 아니라니까요.”

이렇듯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자기를 너무 과신하거나 합리화합니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죠.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여기도록 믿는 것,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오도하고 그릇된 신념을 자꾸만 정당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기만입니다.

 

독일 문학의 거장인 괴테가 쓴 시 중에 ‘자기기만’이라는 제목의 재미있는 시가 있습니다.
 

이웃집 아가씨 방의 커튼이
흐늘거리고 있다.
틀림없이, 내가 집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이쪽을 엿보는 것이다.

내가 낮에 보였던
질투의 불길이,
그리고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으면 싶은 질투가
가슴속 깊이 타오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예쁜 아이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저 커튼을 흔드는 것은
저녁 바람이라는 것을.


어떻습니까? 굉장히 유쾌하고 유머가 넘치는 시죠?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습니다. 그 옆집에 그녀를 사모하는 남자가 살고 있습니다. 남자는 아가씨의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지켜봅니다. 혹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면 다가가서 말을 붙여볼 생각으로 말이죠.

하지만 아가씨는 이 남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남자는 아가씨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낮에 그 아가씨가 웬 남자를 만나는 장면을 봅니다. 질투심이 일었습니다. 나한테는 일절 관심도 없으면서 다른 남자를 만나다니……. 남자는 아가씨에게 다가가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으며,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걸 질투하고 있다는 표현을 합니다. 노골적으로 말이죠. 그러고 집에 돌아와 아가씨의 반응을 살핍니다. 그녀가 내 마음을 알아줬을까? 내가 아직도 그녀를 향한 질투심에 불타고 있는지 궁금해할까? 그녀 마음을 알고 싶어 견딜 수 없습니다. 남자는 연신 이웃집 아가씨 방을 살핍니다. 그때 그녀 방의 커튼이 흐늘거립니다. 아주 좋은 징조입니다.

‘오, 맞아. 틀림없이 내가 집에 있는지 알고 싶어서 이쪽을 엿보는 거야. 내가 낮에 보였던 질투의 불길이 아직도 내 가슴속 깊이 타오르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겠지? 이제 됐어.’

남자는 쾌재를 부릅니다. 자신의 오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거두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옆집 아가씨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질투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가씨 방의 커튼이 흐늘거린 것은 저녁 바람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겁니다. 아가씨는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일절 신경 쓰지도 않는데, 바람 때문에 그녀 방의 커튼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자기한테 관심이 있어 엿보는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들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면서 헛된 꿈속을 거닐듯 살아가는 사람들을 풍자한 시입니다. 이게 자기기만입니다.

 

자기기만은 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생겨나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바로 객관적인 평상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기만이 계속된다면 객관적인 현실과 진실로부터 자꾸만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기만에 빠지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길은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이죠. 내가 변해야 상대방이 바뀌고, 세상도 달라집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내가 나를 속이고 자기기만에 빠져 살면, 상대방도 바뀌지 않고, 세상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뭔가 마음먹은 대로 잘되지 않을 때, 계획했던 일에 진척이 없을 때, 답답하고 초조한 건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도망을 치거나, 현실을 왜곡하거나,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자기기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나를 더 아껴주고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면 그런 나로 인해 상대방이 바뀌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자기기만’이라는 의미심장한 시를 썼던 괴테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고난이 있을 때마다, 그것이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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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의도힐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저서 <마음은 괜찮냐고 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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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의 노력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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