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사연) 

저는 평범한 30대 기혼 여성입니다.

3~4년 전쯤부터 눈뜨고 잠자기 전까지 갑자기 종일 툭툭 튀어나오는 과거의 기억들이 저를 괴롭게 합니다.

처음에는 소위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이불킥(과거 부끄러웠던 실수들)이 떠오르는 건 줄 알았는데 이게 점점 더 발전하더니 현재는 그 기억이라는 것들이 실수에 대한 부끄러운 사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상의 기억, 좋았던 기억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기억들이 모두 다 저의 잘못처럼 떠오릅니다. 그냥 과거의 여러 가지 기억들이 쉴 새 없이 잡념처럼 떠올라 저를 괴롭게 하는데요. 도대체 왜 평범한 일상의 기억마저 마치 ‘상처의 기억’처럼 나쁜 기분이 들면서 떠오르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감정이 왜 죄책감인지 모르겠어요.

남편이랑 길을 가다 벌목하시는 공무원분들을 보고서 “나무들 이발한다~”라고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이발’이라는 단어를 말하자마자 몇 해 전 친정아버지께서 “나는 30년간 똑같은 이발소를 이용한다”라며 말씀하셨는데 저 혼자 속으로 ‘몰랐는데.. 그러셨구나.’하고 생각한 기억이 떠올랐는데 문제는 이게 왜 죄책감과도 같은 감정과 함께 떠오른 것인지 저조차 모르겠어요.

시아버지와 시댁에서 식사하며 화기애애했던 대화, 이전 사무실 사람들과 대화 나누었던 기억, 가족이나 친구들과 있던 일상적인 기억들이 점점 죄책감이라는 이상한 감정으로 툭툭 튀어나와, 일부러 잡념을 안 하려고 노력하다 심지어 욕이나 나 스스로에게 ‘하지 마’라며 혼잣말을 하거나 감정적으로 지칠 때가 있어요. 때론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30여 년간 살아오면서 나름 화목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생활도 행복하고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조금 있는 편이지만, 그 정도는 저보다 더 심한 이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업무 시에 컴퓨터를 오래 하다 보니 밤샘도 잦고 스트레스가 있는 편이지만 이따금씩 산책하면서 스스로 해소하려고 하는 편이고 긍정적인 편에 속하는 성격이라 생각하는데 점점 빈도나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아 나만 이런 건지 답답하고 궁금하네요. 이런 것도 병인가요...?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의학신문 정희주입니다.

과거의 기억들이 쉴 새 없이, 잡념처럼 떠올라 괴롭다고 하셨네요. 특히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 중립적인 경험마저 내 잘못인 것 같은 죄책감이 들기까지 하고요.

인생의 실패, 수치스러웠던 기억, 후회하는 일 등을 머릿속에서 되새김질하는 것을 반추(rumination)라고 합니다. 우리 기억 속에서 강렬한 감정과 연관되었던 기억일수록 이렇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글쓴이분이 적어주신 것처럼 자기비난과 짝지어진 형태로 나타나 자신을 괴롭히는 경우가 흔합니다.

반추하는 성향 자체가 고쳐야 할 병은 아닙니다. 실수를 곱씹고 대안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자기반성과 미래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추를 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빠져나오기 힘들다면, 자기비난과 어우러지면서 우울증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먼저 반추사고 자체가 잘못되거나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억지로 막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그럴수록 더욱 심해지기만 할 것입니다. 마침 스스로에게 ‘하지 마’라고 혼잣말을 하거나 감정적으로 지칠 때가 있다고 적어주셨네요.

억지로 과거의 부정적 사고를 억누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객관적으로,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떠오르는 밀어내거나 잡아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늘의 구름이 떠내려가듯 머릿속에서 지나가도록 바라만 보는 것입니다. 동시에 현재의 내 호흡, 감각, 신체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간략하게 몇 줄로 적었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마음챙김이라고 하는데,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에 지배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좀 더 근본적으로는 어떠한 점이 반추를 일으키게 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부정적 기억이 자꾸 떠오른 것을 신체적으로 비유하자면 기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기침이 나온다면 기침 자체보다 증상을 유발한 내적인 원인, 예컨대 알레르기인지 독감인지 혹은 폐렴인지를 파악하고 이를 치료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반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의 특별한 성향이 글쓴이분과 같은 상황을 유발할 수 있으며 완벽주의적인 성격, 가혹한 도덕적 기준, 지나치게 내 탓을 하며 내부귀인하는 사고방식이 대표적입니다. 내가 이런 성향과 사고방식을 가진 것은 아닌지 찬찬히 되돌아보고 그것들이 과연 나에게 어떤 도움과 어떤 해로움을 주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한편 부정적 감정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부정하려는 성향 역시 영향을 미칩니다. 억압된 감정과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무의식에 살아남아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나름 화목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랐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나 서운함, 수치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타인의 심각한 고통보다 내 사소한 불편함을 더 크게 느끼는 것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누구나 그러하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내가 경험하고 느꼈던 사건과 감정들을 남들에 비하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하기보다는 그것들이 당시에 나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고 힘들게 했는지를 깊게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그러한 경험을 타인과 나누거나 일기를 써보는 것, 혹은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정신의학신문 정희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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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역 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졸업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성동구 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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