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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s Mail] 제 공간에 남이 들어오는 게 너무 싫어요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20.11.19 04:18

[정신의학신문 : 광화문 숲 정신과, 김재옥 전문의] 

 

사연) 

저는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제 방을 정리하는걸 너무 싫어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도 엄마가 책상 정리를 하면 한바탕 떼를 썼습니다. 중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는 좀 더 강하게 말해 봤는데 엄마는 전혀 이해를 못하시더라고요. 중고등학생 때 학교 다녀와서 책상이 정리되어 있으면 정말 감정이 주체 안 돼서 꺽꺽 울었습니다. 사실 비밀스러운 물건이 있다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닌데도요.

 

그러고 성인이 되어서 십 년을 자취하다가 올해 우울증과 불안장애가 많이 악화되어서 다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근데 전 여전하더라고요. 그간 혼자 살다 보니 제가 제 공간을 중요시하는 걸 저조차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자취방에 엄마가 오셔서 살림살이 구석구석 정리하시는 게 너무 싫긴 했었네요. 엄마는 엄마대로 노동하니 지치고 저는 제 물건 손대는 거 지켜보는 게 지쳤죠. 제가 집에 내려와서 저의 이런 점을 존중해달라 엄마에게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안 받아들여지니 저는 저대로 점점 심해집니다.

처음엔 내 방은 내가 청소한다 들어올 때 노크 좀 해라, 다음에는 노크하고 내가 대답하면 들어와 달라, 이제는 거기에 더해서 방 입구에서만 말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끔 들어와서 방 스캔하듯이 살피면 진짜 소리 지르고 싶고 별 생각이 다 듭니다.

방에 뭐 숨겨두는 것도 못 보일 것도 없는데 그냥 화가 납니다. 내 공간을 안 지켜주는 엄마가 밉다가 결국엔 그런 나를 미워하고 욕합니다. 이젠 가족 누구도 노크나 말없이 문을 벌컥 열지도 않는데 왜인지 이유 없이 불안해서 문을 잠그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역시 숨길 것도 없고 방에서 기껏 하는 건 인터넷 서핑, 독서, 명상, 요가 이런 것뿐인데 문을 잠그면 안심돼요.

 

제가 우울증이어서 그런 걸까요? 그러면 저는 어렸을 적부터 아픈 거였을까요? 나만의 공간을 유독 중요시하는 제 심리가 뭔지 저도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상한 거여도 그냥 제 방은 저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은데 엄마한테는 어떻게 말씀드려야 납득하실까요? 엄마도 최선을 다해서 저를 존중해주시려 하는데 그런 엄마한테 화내고 상처 주는 제가 싫어요.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광화문 숲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재옥입니다.

한집에 사는 가족으로서 지켜야 할 선은 있습니다. 방 밖으로 심한 냄새가 나거나, 방 안에 공용으로 사용하는 물건이 있거나, 수납을 해야 하는 경우 당연히 가족이 방에 들어올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 방을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그 방에 있는 사람의 사생활을 지켜야 하죠. 이런 선에 대해 서로 합의가 되어 있지 않다면 당연히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가장 가까운 사람과는 가장 많은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갈등이 있는 두 사람끼리 중요한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갈등은 다른 부분까지 번지게 됩니다. 그 갈등은 일상의 다른 부분들을 잠식하고, 갈등이 다른 갈등을 만드는 악순환을 유지시키죠.

 

질문자분이 현재 겪고 있는 갈등도 이런 악순환의 한 부분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어머니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자녀가 싫어하는 행위를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데는 단순히 책상을 정리하거나 방을 치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결될 수 없는 갈등으로 인해 누적된 불만을, 질문자분이 싫어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표현하고, 해소하는 거죠. 하지만 본질적인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불만이 쌓이고 다시 대상을 자극에서 해소하는 일이 반복되게 됩니다.

따라서 갈등을 겪는 두 사람이 서로 어디까지 권리로 생각하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듣고 서로 합의하는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면 숨어있는 갈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질문자 분이 그런 규칙 제안을 꽤 많이 하셨다는 점입니다. 방 청소를 하지 말라는 규칙부터 노크, 노크하고 대답하면 들어오는 것, 아예 방 입구에서만 말하는 것, 이렇게 점점 요구 강도가 심해지면서 말이죠. 이런 변화를 보면, 어머니가 질문자분의 요청을 잘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질문자의 요청을 들어줬다 하더라도 질문자분이 추가로 갈등 사항을 더해갔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어머니와의 갈등은 단순히 어머니가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자분도 갈등에 기여를 하고 있으며, 이런 부분은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신 듯합니다.

 

사람은 어떤 삶을 살든, 자신 삶의 경계 안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정하고, 중요한 것을 침범당했을 때 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종종 삶 안에 중요한 것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 임의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정하고, 그것으로 갈등이 일어난 경우 투쟁한 뒤, ‘내가 이렇게 투쟁하는 것을 보니, 이게 정말 나에게 중요한 것이다’라고 반대로 믿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종의 실체가 없는 투쟁인 거죠. 하지만 이 투쟁 덕분에 내 삶에도 중요한 것이 생김으로써,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투쟁에 포함된 이들은 고통을 겪죠. 본인도 포함해서요.

현재 질문자분이 어떤 삶을 살고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갈등은 내 삶을 돌이켜 보게 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기도 합니다. 이 변곡점에서 충분히 고민하셔서 좀 더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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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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