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재의 <영화 속 마음을 읽다>

[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본문에는 영화 '배트맨-다크나이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 한가운데에 엔진이 멈춘 두 척의 배가 있다. 한 척의 배에는 불길에 휩싸인 도시로부터 떠나는 일반 시민들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한 척의 배에는 호송 중인 죄수들이 있다. 양측의 배에는 모두 스위치로 작동되는 폭탄이 있다. 폭탄이 터지면 그 누구도 배에서 살아나갈 수 없고, 폭탄이 터지기 전 배에서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시민들의 배에 실린 폭탄의 기폭장치는 죄수들에게, 죄수들의 배에 실린 폭탄의 기폭장치는 시민들에게 주어진다. 12시 이전까지 주어진 스위치를 눌러 상대 쪽 배를 폭발시키면 다른 한쪽의 배의 폭탄은 터지지 않는다. 만일 12시가 돼도 아무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두 척의 배는 모두 폭발한다.

선량한 시민들이 죄수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울까? 하지만 죄수들은 이미 형을 받고 복역 중인 상태이다. 서로의 목숨을 빼앗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정의일까? 하지만 아무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채로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목숨을 잃게 된다. 어떠한 선택을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게임이론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온갖 범죄와 마약, 부정부패로 병들어가는 도시가 있다. 존경받는 기업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소년 ‘브루스 웨인’은 부모님과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도의 총탄에 부모를 잃는다. 소년은 병적으로 범죄와 악을 증오하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소년의 신념에 비해 악은 너무나 거대했다. 그래서 소년은 빠르고 알기 쉬운 길을 택한다. 그날부터 도시의 밤에는 범죄자들을 잔인하게 린치하는 박쥐를 닮은 남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배트맨의 탄생이었다.
 


폭력이 주는 메시지는 강력했다. 몇 년이 지나자 범죄율이 점차 줄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얻어진 결과는 완전한 선이 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년의 정신은 망가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괴물의 가면을 쓴 인간이었던 소년은 점점 인간의 가면을 쓴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점차 범죄자와 스스로를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살인만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신조가 범죄자와 자신을 구분하는 마지막 선이었다. 

어느 날 브루스는 강직하고 흔들림 없는 검사 하비덴트에게서 희망을 본다. 하비는 인간과 괴물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과는 달리 모두에게 공인받은 합법적인 정의였다. 브루스는 그의 그림자에 숨어 모순된 정의를 집행해 나가며 최종적으로는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고자 한다. 그가 사랑하던 도시에 모두가 인정하는 누군가를 세움으로써 법과 정의가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주기 위해서였다.

영화 <다크나이트>는 두 남자, 브루스와 하비가 동시에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러나 이들을 몰락시킨 것은 신이 주신 시련도, 악마의 달콤한 유혹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본모습이 나온단 말야.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네 친구들을 네가 평생 알고 있었던 것보다 잘 아는 것은 바로 나란 말이지! 그놈들 중에서 누가 겁쟁이였는지 알려줄까?”

- 조커, 영화 <다크나이트>

 

영화의 빌런인 조커는 찢어진 입의 흉터를 광대분장으로 가린 보통 사람이다. 하지만 이 평범한 남자는 끊임없이 브루스 웨인과 고담시를 한계로 몰아붙인다. 그는 선동의 명수이다. 절망과 공포를 통해 악의를 증폭시킨다. 그가 배트맨과 벌이는 게임을 통해 고담시의 선의는 무력하고 어리석은 행위가 되고, 삶을 위한 욕구는 타인을 짓밟는 욕망으로 변모한다. 

 

인간을 크게 두 그룹으로 분열시키는 것이 조커의 대표적인 선동방식이다. 분열된 그룹의 크기가 서로 비슷하다면 전쟁을 시작할 것이며 한 그룹이 다른 그룹에 비해 압도적이라면 소수파에 대한 따돌림과 조리돌림이 시작된다.

그가 처음으로 분열시킨 것은 배트맨과 그 나머지 사람들이다. 조커는 배트맨이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고 대중 앞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며 배트맨이 자신의 요구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죄 없는 시민들을 한 명씩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배트맨이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에게 의지하던 시민들은 이제 원론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 일반 시민인 나의 생명은 범죄자의 생명에 비해 더 소중하다. 딱히 선한 일도 하지 않았지만,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으므로 나의 생명은 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배트맨의 방식이 비합법적이며 그가 위험인물임을 상기하기 시작한다. 살인을 하는 자는 조커였으나 시민들은 배트맨에게 원망을 쏟아낸다. 단 한 명의 생명도 살려본 적 없는 이들이 수많은 생명을 살려온 이에게 비난을 쏟아붓는다. 너무나 분명했던 선과 악의 싸움은 이제 명분과 정치싸움이 되어 혼탁해진다. 

조커는 인간의 속성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생명이 달려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개인으로 활동할 때와 집단 속에 숨겨져 있을 때 인간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는 것을 말이다. 시민들의 분노는 조커 대신 배트맨에게 향한다. 마치 그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것처럼. 사람들은 위험한 것과 싸울 때보다 안전한 것과 싸울 때 훨씬 더 용감했고, 영웅으로 추앙받던 배트맨은 한순간에 악당이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광기란 건, 알다시피, 중력 같은 거야!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되거든!”

- 조커, 영화 <다크나이트>

 


두 번째로 조커가 한 일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제한된 시간 동안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배트맨과 하비 덴트가 공통으로 사모하는 여인인 검사 ‘레이첼’을 납치한다. 그리고 결코 두 명을 구할 수 없는 시간만을 주고 배트맨에게 하비덴트와 레이첼 둘 중 하나만을 살리도록 몰아넣는다. 물론 선택은 배트맨의 몫이다.

조커는 신념을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려는 사람의 약점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신념을 세상 전부에 적용해야 하지만, 신념을 수행하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개인이고 그 영향력은 미약하다.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에게 엄격한 자를 공격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개인의 행복과 공익, 둘 중 하나만을 구할 수 있도록 강요당한 브루스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그는 끝내 자신의 신념을 부정하는 선택을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신념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러 간 곳에서 브루스는 레이첼 대신 하비를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 화면 너머의 레이첼은 불길에 휩싸여 죽는다. 자신 대신 레이첼을 구하지 않은 배트맨을 저주하는 하비의 얼굴 절반 또한 불길로 뒤덮인다. 신념을 구하려는 이에게는 신념을 빼앗고, 개인의 행복을 구하려는 이들에게는 행복을 빼앗았다. 완벽한 모욕이었고, 조롱이었다. 

인간의 분열, 시간의 제한, 선택과 책임에 대한 조롱. 조커의 세 가지 계획에 따라 소중한 것을 잃은 하비덴트는 끔찍한 화상에 뒤덮인 자신의 얼굴처럼 무법자로 거듭난다.

이전의 그는 양쪽이 모두 앞면인 동전을 가지고 다니며 중요한 일을 결정했다. 몇 번을 던지든 당연히 동전은 앞면만을 가리켰다. 이것은 그의 신념과 그 신념에 대한 책임을 상징했다. 그는 결코 우연을 탓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동전의 한쪽면은 그의 얼굴과 함께 그을려 앞과 뒤가 생겨버렸다. 이제 동전 던지기의 결과는 순전히 우연에 따라 결정된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선택에 책임지지 않는다. 조커는 이죽거린다. 
 

 

“혼란을 좀 보여주고 정립된 질서를 뒤엎으면 모든 게 개판이 되지. 나는 혼돈의 대리인이야. 혼돈의 특징이 뭔지 아나? 공평하다는 거야.”

- 조커, 영화 <다크나이트>

 

조커는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커는 자신의 혼란스러운 도덕관이 새로운 세상의 기준이 되기를 원했다. 그가 원한 것은 선과 악의 기준을 무너뜨려 사람들의 판단기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앞뒤가 명확히 다른 동전을 던져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하비는 이제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신념과 어긋나도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하비는 세상을 향한 이율배반적인 분노를 마음껏 표출하는 괴물이 된다. 결정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운명이니까. 내가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자신이 설계한 게임에 굴복하여 날뛰는 하비의 이 모습이야말로 조커가 원하는 인간의 모습이었고, 조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하비에게 총을 쥐어준다. 이어서 조커는 마지막 계획을 실행한다.

 


강 한가운데에 엔진이 멈춘 두 척의 배가 있다. 한 척의 배에는 일반 시민들로 가득 차 있고, 다른 한 척의 배에는 죄수로 가득 차 있다. 양측의 배에는 모두 스위치로 작동되는 폭탄을 설치하고 시민들의 배에 실린 폭탄의 기폭장치는 죄수들에게, 죄수들의 배에 실린 폭탄의 기폭장치는 시민들에게 건넨다.

배 안의 사람들은 울부짖는다. 우물쭈물하다가 상대방 쪽 배에서 자신만 살려고 기폭 버튼을 누를지도 모른다. 인간의 도시에는 지옥의 풍경이 펼쳐지고, 조커는 숨어서 웃음을 터뜨린다. 인간의 분열, 시간의 제한, 자유의지에 대한 조롱.

조커의 게임에 휘말린 이들은 살면서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않은 상대를 증오하며,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세상을 좀먹는 바이러스라고 믿게 된다. 서로를 죽일 무기를 손에 쥔 채로 상대방과 내가 공유한 모든 공통점은 깡그리 무시한 채 증오의 연쇄로 떠밀린다.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방아쇠를 당기도록 시간제한까지 두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공포에 몰아넣고 전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조커는 이것이 공평하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자신의 마음속에는 타인을 증오하고 착취할 생각밖에 없기 때문에, 단지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 남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막상 자신은 그 누구보다 안전한 곳에 있으면서도 타인을 부추긴다. 손에 방아쇠를 쥔 건 당신이다. 그러니 당신은 그들을 증오하는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상대방에게 방아쇠를 당겨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길 것이다. 

증오의 게임을 설계한 이들은 세상이 불타기를 원한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세상에 대한 증오를 타인의 손을 빌려 표출하고, 자신만이 ‘정상’이자 ‘기준’이 되고 싶어 한다. 

다양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은 이제 끔찍한 가해자와 무력한 피해자로만 나뉜다. 자신의 것이 아닌 증오를 마치 자신의 증오인 것처럼 느끼고,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끔찍한 폭력의 죄책감 또한 대신 지게 된다.

타인의 마음과 인생을 그 자체로 존중하지 않고 단지 자신을 위한 물건으로 만들고 조종하려 드는 것. 사람들의 삶을 이분법의 전쟁으로 몰아넣어 단순화시키고 마음대로 징발하려 드는 ‘투사적 동일시’. 타인에게 각자 고유한 생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순교자가 될 것을 강요한다. 순교를 거부한다면 악당의 낙인을 찍는다.

이 게임에 휘말린 자의 결말은 둘 중 하나이다. 

‘영웅으로 죽거나, 살아남아서 악당이 된 자신의 모습에 절망하거나’. 
 

 

“우린 왜 넘어질까?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란다.”

- 토머스 웨인, 영화 <배트맨 비긴스>  

 

그러나 상대방이 나를 죽일 수 있다면,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상대방 또한 내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방아쇠에 걸린 내 손가락이 망설이고 있다면 그것은 나 또한 상대방이 바이러스가 아닌 나와 같은 인간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 느끼고 있음이다.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일부분. 전부 다 안다고 믿었지만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이면들.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할 수 있었다면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를 믿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배 안에 갇힌 사람들은 서서히 자신들을 둘로 가르고 서로를 죽이도록 몰아넣고 있는 자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기폭장치를 누르는 대신 그 누구도 누를 수 없도록 강물에 던져버린다. 배트맨은 조커가 준비한 배로 향하는 대신 조커 본인에게로 직진한다. 시민들과 배트맨 모두 조커의 게임을 거부하기로 한 것이다. 

조커가 숨어있는 곳에는 인질로 위장된 테러리스트와 테러리스트로 위장된 인질이 있었다. 이러한 배치는 조커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생각해보면 조커는 늘 그래왔다. 인간의 선한 의도가 역으로 사람들을 해치도록 하여 신념을 이기심으로 보이게 하도록. 삶에 대한 열망을 타인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 누군가에게 집중시키도록. 그래서 인간의 옳음과 그름에 대한 판단을 혼돈으로 몰아넣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진리인 것처럼 착각시키도록. 옳음과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도록. 만일 누군가가 상대방 쪽 배의 스위치를 눌러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조커는 살아남은 절반을 대상으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터였다. 

시간이 지나도 폭탄이 터지지 않자 조커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사라지고, 배트맨은 유유히 테러리스트로 위장된 인질들을 구출하며 조커를 비웃는다. 

 

“무엇을 증명하고 싶었나?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너처럼 추악하다는 것?
안됐지만, 추악한 것은 너 혼자인 것 같군.”

- 브루스 웨인, 영화 <다크나이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결말은 비극이다. 영화의 마지막, 살인을 일삼다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한때는 선의 상징이었던 하비의 모습을 본 브루스는 자신이 끝내 조커에게 패배했음을 깨닫는다. 영락한 하비의 모습은 인간이 결코 악의 충동에 저항할 수 없다는 조커의 말을 증명하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조커를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조커를 진정으로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는 그가 세상에 퍼뜨려 놓은 메시지를 반박해야만 했다. 브루스는 스스로 악당이 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사랑은 자신이 얼마나 남을 위하는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용기는 남의 추악함을 드러내 모두의 앞에 쓰러진 자를 한 번 더 찌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그 누구도 배트맨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내가 죽인 거요. 그게 내 역할이오. 
조커가 이겨선 안되오. 내가 그랬다고 하시오.
날 쫓으시오. 비난하시오. 개들을 풀어요.
진실만으론 부족할 때가 있는 거요. 가끔은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오.
가끔은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오.”

- 브루스 웨인, 영화 <다크나이트>

 

슬프게도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위기 앞에서 인간은 하나가 되지 못하였다. 대신 인간은 서로를 장기말로 한 게임을 시작했다. 코로나에 대항하는 대신 서로를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박멸하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코로나와 싸울 때보다도 인간과 싸울 때 훨씬 더 용감하였다.

한 그룹을 바이러스로 몰아 멸망시키고 나면 불안한 나머지 다시 또 누군가를 바이러스로 몰아 멸망시킬 것이다. 악의의 전염력은 바이러스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빨라 예정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인간을 멸망시킬 것이다.

게임의 밖을 보아야 한다. 이 게임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누가 인간을 갈라놓고 서로를 증오하게 하는가? 누가 타인의 인생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물건으로 삼는가? 누가 인간의 신념을 정치의 도구로 삼아 변질시키는가? 감히 누가 이 잔혹한 게임을 설계하고 시작하도록 타인의 등을 떠밀고 뒤에서 조롱하는가?
 

사진_픽셀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결코 세상의 일부를 적으로 삼고 증오하라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지키고 싶다면 그는 설령 자신의 손을 피로 더럽힐지언정 결코 당신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 방아쇠를 당기라고 종용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을 존중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당신을 마음이 없는 도구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과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그는 결코 제한시간을 정해둔 채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는 끝이라며 최후통첩을 남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는 결코 우리 중의 하나를 벌거벗긴 채로 대중의 눈 앞으로 끌어내어 망신을 주고, 마치 이 사람이 모든 재난의 시작인 양 몰아붙여 사람들의 비난 속에 멸망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행하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만큼 남을 사랑하는지를 자랑하는 전시장이 아니다. 용기는 위험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행위이다. 우리 중 누군가를 끌어내어 악당으로 만들고, 나머지가 선이 되어 안심하기 위한 마녀사냥이 아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영웅으로 죽거나 악당이 되어 살아남아서는 안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증오를 위한 도구가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다.
우리는 물건도 아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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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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