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뺨을 손바닥으로 맞을 때 ‘짝’ 소리가 난다는 말은 허구이다. 그것은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이 합을 맞춘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하다. 실제로는 때리는 사람의 손목도 맞는 사람의 목도 굳어있기 때문에 둔탁한 ‘퍽’ 소리가 나게 된다. 나는 그렇게 바닥을 굴렀다.

뺨이 바닥에 닿아본 것은 유년기 이후 처음이었다. 뺨으로 느낀 바닥은 의외로 차갑기보다는 미지근했고, 입속에서는 피맛이 났다. 웅크린 등을 한 번 더 걷어 채인다. 뼈를 통해 전달된 머릿속 진동이 진정되자 나는 그제서야 폭력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하지만 얼얼한 머리와 쑤시는 등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수치심이었다. 사람들이 그와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말리는 사람 하나 없이 수군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나를 제외하고는 이 중 그 누구도 바닥의 먼지를 자신의 뺨으로 쓸어보지는 않았으리라. 모두의 앞에서 폭력을 당한 그 순간, 나는 인간 그 이하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유난히 어두웠다. 주인을 보호하고자 스스로 얼어붙었던 마음이 비정상적인 침착함에서 풀려나는 것을 느낀다. 만일 그의 손에 칼이라도 들려있었다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 길을 다시 밟지 못하였을 것이리라.

갑자기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날 만큼 몸이 후들거렸다. 몸서리가 쳐졌다. 그동안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던 지나가는 행인들의 덩치와 주먹과 팔근육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만일 그가 나에게 달려든다면 나는 막아낼 수 있을까? 도망가야 하나? 맞서 싸워야 하나? 내가 만일 그대로 죽는다면 내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오늘 일을 겪지 않았다면 결코 상상하지 않았을 끔찍한 상상이 내 머리를 채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잊을만하면 튀어나와 나를 오래도록 고문했다.

 

폭력은 그러한 것이다. 우리는 주인공의 주먹질 한 방에 날아가 기절했다가 다음 장면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액션 영화 속 엑스트라가 아니다. 그것은 피해자가 앞으로 겪게 될 세상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폭력의 경험이 없었다면 보았을 삶의 밝은 일면을 영원히 빼앗기게 된다. 

그리고 2020년 8월 5일 어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한 분이 자신이 돌보던 환자에게 빼앗긴 것은 다른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보다 더 컸다. 그날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그분은 그날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무심히 했던 가족과의 인사가 그의 생애 마지막 작별인사였음을 그날의 그의 가족들은 알고 있었을까?
 

사진_픽사베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침통하다. 분노하는 이들도 있고, 애통해하고, 무력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이윽고 이들은 한 명씩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코뼈가 부러져 수술을 받은 뒤에도 지금도 가끔 코피가 난다고 한다. 후배 누구는 왼쪽 엄지손가락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뉴스를 보고 옛날 자신이 당했던 폭력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진료를 마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의 끔찍한 경험이 동료의 소식을 통해 재경험되는 것. 이들은 모두 상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음 차례는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쟁을 경험한 이들이나 경험할 법한 집단적 PTSD 증상이었다.

 

2018년의 마지막 날,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편견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오던 한 의사의 끔찍한 최후는 사회에 큰 슬픔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후 안전한 진료 환경 조성을 위한 정부의 대책이 소위 ‘임세원 법’이라는 이름으로 줄줄이 발의되었지만 발의된 30개의 법안 중 통과된 건 단 3개에 불과했고, 자신의 생명보다 동료직원의 안전을 선택한 임세원 교수를 세상은 끝내 의사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2019년 4월 임세원법이 통과되며 100병상 이상 정신병원•종합병원에 비상벨과 보안요원을 두도록 의무화했다. 입원환자 1인당 하루 1210~3200원의 환자안전관리료를 신설해 비용조달을 돕는다.

하지만 20병상에 불과한 부산의 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입원환자가 없는 외래 위주의 의원은 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오늘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여전히 폭력 앞에, 칼날 앞에, 휘발유 앞에 맨몸으로 노출되어 있다.

 

“보안인력과 비상벨을 의무화하려면 여기에 드는 비용을 보상해줘야 하는데, 의원급은 방법이 마땅찮다.”

- 보건복지부

 

2016년 개봉된 영화 ‘날 보러와요’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환자들에게 장기밀매와 강간, 비리를 일삼는 악마로 묘사되었다.

그해 9월 28일 의정부지방검찰청은 보호의무자 동의로 강제입원한 정신질환자들에게 서류 미구비 입원 등을 진행하였다며 경기 북부 일대 정신과 전문의 39명을 정신보건법 등의 위반혐의로 입건하였다. 해당 의사들과 병원은 언론의 대서특필 하에 손가락질당했고, 이들이 받은 무죄선고는 수년 후 신문의 아주 작은 구석에 잠깐 실렸다.

국민 드라마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작년의 한 드라마에서는 칼을 든 환자에게 쫓기는 의사의 모습이 코믹하게 그려진다.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청소하다가 사망한 노동자분의 애통한 죽음을 톰과 제리와 같은 코미디로 만드는 격이다.  

 

병원에서 폭력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동이 증상은 아니듯이 정신질환을 관리하는 모든 방법이 의학에만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곳에는 사회 구성원들의 공식적인 합의가 필요한 수많은 구멍이 존재한다. 예컨대, 보호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병동규칙은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띄어야 할까? 그 강제력은 자해 및 자살시도와 같은 정신증상에 대해서만 해당될까 아니면 담배를 피우고 다른 환자를 성희롱하는 사회도덕적인 행동까지도 포함할까? 

그것보다 더 애매한 경우라면? 충동 조절의 어려움으로 입원한 환자가 병동 내에서 음성증상이 심한 조현병 환자를 하인처럼 다루며 심부름을 시킨다면 어떻게 조치를 취해야 할까? 어떠한 이들이 병원비나 진단서 문제로 원무과와 갈등을 빚으며 고성과 함께 행패를 부린다면 이를 증상으로 보고 치료해야 할까? 그리고 그 상황에서 취한 의사의 조치는 어느 정도의 강제력을 띄는가? 

 

폭력과 갈등은 그 빈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 빈 곳이 의사와 환자의 사이를 갈라놓고 그 벌어진 틈을 적의와 불신으로 채운다. 정신의학은 환자의 증상과 감정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지만. 증상과 감정의 결과인 폭력을 대처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환자에게 욕설과 폭력을 당한 후배의사의 상처를 외부에 감추고, 대신 후배의사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반성하기를 강요하는 선배의사는 좋은 선배가 아닌 천치 혹은 비겁자이다. 의학 또한 인간의 사회에 발을 딛고 서 있기에, 그곳에는 의학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빈 곳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보고도 모르거나 아니면 못 본 척했기 때문이다. 
 

사진_픽사베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한 나라의 영토에 국민으로 발을 딛고 있는 이상 모든 자살은 사회적인 면을 포함한다는 에밀 뒤르켐이 이론처럼, 사회 속의 모든 폭력과 살인 또한 사회 시스템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두 명의 고귀한 생명의 죽음 앞에서 이번에도 우리의 사회 시스템은 침묵한다.

사람들이 폭력에 침묵하거나 관심 없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자신은 결코 그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일한 믿음은 진주아파트 방화 살인사건,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이제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이들이 갈 곳은 더욱 좁아져 버렸다. 지역사회의 그 누구도 자신들이 사는 근처에 정신병원이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보호자들은 하나둘씩 지쳐 자신들의 가족들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히포크라테스가 남긴 고귀한 선서는 암송할 때에는 듣기 좋고 달콤하지만, 실제로 실현할 때는 땅과 숲을 깎아야만 가능하다. 누구의 땅과 누구의 숲을 얼마만큼 깎아야 하는지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고, 계산하고, 그에 따른 실질적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도 부산의 한 의사의 죽음은 젊은 국회의원의 옷차림에 대한 기사에 밀려 포털 뒤편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정신은 옳은 것과 잘못된 것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갈등조차도 아니다. 

극복해야 할 것은 자기모순이다. 타인에게 가지고 있는 더러움이 나에게도 있다는 불편한 현실을, 자유를 실현하자니 사회정의가 부정당하고 공익을 실현하자니 나의 존엄이 침해당하는 이 고약한 진실을 다루는 법을 학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학습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시도와 결과의 해석, 통찰과 자기이해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성숙도 사회의 성숙도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의료에서 의학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회색지대는 분명히 존재한다. 정신질환자들의 강제입원 여부의 결정권을 국가기관으로 이관하는 ‘사법입원’을 반대했던 것은 의사단체가 아니라 환자단체였다. 부산의 한 환자가 의사에 대하여 살의를 품은 이유는 원하지 않았는데 입원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원하지 않는데 퇴원당했기 때문이다.

이 모순과 딜레마로 가득 찬 회색지대를 드러내고 사회적 합의로 채우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교도소 담장을 위태롭게 걸을 것이다. 그 담장의 한쪽 면으로 떨어진 자는 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돌을 맞고 지탄을 받을 것이며 다른 쪽 면으로 떨어진 자는 피해자가 되어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눈물 흘릴 것이다. 

 

드러내야 한다. 논의해야만 한다. 피와 고함과 오해와 눈물로 채워져 있는 그 회색의 공간을. 유아의 환상처럼 착한놈과 나쁜놈으로만 채워져 있는 그 딜레마의 공간을. 그것이 끝내 퇴근하지 못한 두 선생님에 대한 예의와 추모이다. PTSD에 시달리고 있는 수많은 폭력의 희생자들의 상처에 대한 건강한 애도이다.

불편한 기억과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드러내고 슬퍼하고, 애도하고 그럼으로써 그 상처를 미래를 위한 이정표로 만드는 것. 부디 그들이 폭력의 희생자가 아닌 훌륭한 의사이자 좋은 가족으로 기억되길. 부디 나의 동료들이 간직하는 인생의 마지막 기억이 뺨으로 느끼는 바닥과 입속을 채우는 쇠맛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눈길과 늘 잠들던 침대의 온기이기를.

 

권순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의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분당서울대병원 전임의
(전) 메디플렉스 세종병원 정신건강의학과장 치매전문센터장
저서 <약한 게 아니라 아팠던 것이다>, <이제 독성관계는 정리합니다>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글입니다. 가슴을 뛰게 하네요. "
    "말씀처럼 가까운 데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늘 감사하게 잘 읽고 있습니다."
권순재 전문의의 대표칼럼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