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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s Mail] 가족의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래도 되는 건가요?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20.05.15 02:58

[정신의학신문 : 신림 평온 정신과, 전형진 전문의] 

 

사연) 

저는 20대 여성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습니다. 사인은 불명이나, 가족들은 아버지가 계속 술만 마시고 몸을 돌보지 않아서 허약해진 것을 원인으로 추측합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심한 알코올 중독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형제들은 타지에서 살고 어머니만 아버지와 살고 계셨고, 저는 사망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문자로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놀라지도 않았죠. '아, 때가 됐구나. 씻고 갈까? 그냥 갈까?' 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주정과 언어폭력, 보호자로서 부적절한 모습들을 보며 자랐기에 아버지를 혐오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자해를 했고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서 계속 상상을 하고 잔인한 콘텐츠를 찾아서 대입해보곤 했습니다. 이게 잘못된 일인 줄 알기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공감도 잘못해서 제가 사이코패스인지 스스로 의심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아닙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하셨는데 제가 간병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면제 부작용 때문인지 아버지가 끝없이 헛소리하고 병실 의자를 들었다 놨다 하고 잠은 안 주무시고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제발 헛소리 그만하고 잠 좀 자라고 짜증을 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제 뺨을 때렸습니다. 그 순간, 간병하며 쌓였던 스트레스와 평생 억눌린 감정들까지 겹쳐 폭발해서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제 뺨을 다시 여러 번 갈겼고 저는 아버지를 밀쳤습니다.

우당탕하며 넘어지자 간호사들이 달려왔습니다. 갑자기 아버지는 얼굴색을 바꾸고 간호사들에게 별일 아니라며 웃었습니다. 아버지는 코피가 아주 조금 났습니다. 간호사들은 제게 화를 내며 아버지를 챙겼고 아버지는 좋은 사람인 척 행동했습니다. 간호사들 눈에는 건강한 제가 환자인 아버지를 일방적으로 폭행한 걸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방금 제 뺨을 여러 번 갈긴 사람이 갑자기 간호사들에게는 멀쩡한 척을 하고, 간호사들이 절 나무라는 걸 보자 모든 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바로 택시와 버스를 타고 자취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맨손으로 폭행당한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이후 저는 환자를 밀쳤다는 약간의 죄책감도 있었지만, 분노와 혐오가 더 커서 아버지와 연을 반쯤 끊었습니다. 반드시 연락해야 하거나 만나야 할 때만 얼굴을 보고 대화는 안 했습니다.

 

제게 아버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이라곤 어릴 때 아버지 팔에 매달렸던 것 단 하나뿐입니다. 나머지 기억은 전부 힘들거나 괴로운 기억입니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몇 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음주운전을 해서 여러 번 혼자 사고 내고, 고혈압 때문에 쓰러지는 등. 그래서 덤덤해진 건가요? 아니면 제가 아버지를 너무 혐오해서 이런 건가요? 아주 조금이라도 안타까운 마음도 없습니다. 입관식을 할 때도 모두가 울었지만 저는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나 했습니다.

비정상으로 보일까 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타깝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후련합니다. 죽인 다음 저도 죽고 싶을 만큼 증오하던 사람이 사라졌으니 이제 더 이상 증오하지 않아도 돼서 마음이 가볍습니다.

 

저는 이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건가요? 이런 제가 남들과 정상적으로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나요?

오직 아버지만 저렇게 미워했고 다른 사람들과는 잘 지냅니다. 공격성은 게임으로 풀고 제가 가진 것들에 매일 감사하며 몇 없는 지인들에게 애정표현하며 살고 있어요.

나쁜 아버지이긴 했지만 제가 이렇게 후련해도 되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이 알면 절 어떻게 볼까요? 타인에게는 말하면 안 되겠죠? 혹시 제가 정말로 인격장애인 건 아니겠죠? 이제 글이나 그림으로 제 어린 시절을 기록하려는데 해도 괜찮을까요?
 

사진_픽셀


답변) 

아버지의 학대에 가까운 모습으로 인해 겪었던 상처로 인해 지금도 다른 생활에서 어려움을 크게 겪는 모습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한편으로 걱정도 많이 되네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부분은 아버지께 받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직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은 용서하거나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의미에 가까울 텐데, 사연을 주신 분이 반드시 아버지를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과거의 상처가 치유된 것도 아닌데 용서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보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스스로 내 상처를 어루만지고 해결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고 싶다면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내 안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료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여유가 생기고 아버지를 받아들일 때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가 되어서 슬퍼하셔도 늦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과거의 상처들이 나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지 살펴보고, 지금 내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는 과정입니다. 글이나 그림으로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것도 이러한 과정에 포함이 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은 아버지에게 향해야 하는 분노가 자신이나 다른 곳으로 향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오히려 염려스럽습니다.

 

요약해보면 아버지를 애도하는 마음이 들기 위해서는 용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용서라는 것은 나에 대한 이해가 먼저 진행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 걱정하고 힘들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내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과거의 상처들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 부분을 먼저 살피고, 이해할 필요가 더 커 보입니다.

아무쪼록 사연을 주신 분이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 조금 더 밝은 생활을 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info.psy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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