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남자 친구를 믿고 싶은데 못 믿는 제가 싫어요. 중학생 때 남자한테 심하게 맞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남자가 너무 무서워요. 벌써 몇 년이 지났고 그때부터 상담도 많이 받았고 약도 먹고 있는데 좋아지지 않으니까 매일 불안하기만 해요. 그래도 지금 남자 친구 만나고 많이 괜찮아진 건데 옆에서 위로도 많이 해주고 도와줘서 제가 세상에서 제일 믿고 있어요.

그런데 남자 친구에 대한 안 좋은 상황이 자꾸 떠올라요. 안 그럴 걸 아는데 남자 친구가 저를 죽일 것 같고, 때릴 거 같고, 그냥 뭔가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자꾸 생각나서 무서워요. 남자 친구가 저를 엄청 위해주는데 못 믿으니까 제가 쓰레기 같아요. 남자 친구가 저를 이해하는데 그게 더 힘들어요. 자괴감만 엄청 들어요. 제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이 하루 종일 나요. 너무 힘들어요. 안심하고 남자 친구를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사진_픽사베이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총기입니다.

예전의 상처 때문에 지금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힘들어하고 계시군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히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 보여 걱정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괴로우신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지금 만나고 계신 남자 친구는 질문자님을 많이 도와주고 위로해주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질문자님도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 말씀해주고 계시고요.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남자 친구라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남자 친구가 그렇게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질문자님께서 더욱 괴로우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조차 안 좋은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것이 질문자님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몇 년째 상담도 받고 있고, 약도 먹고 있고, 너무나 좋은 남자 친구까지 곁에 있는데도 계속 이렇다면, 혹시 나는 이대로 영영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질문자님의 글이 더욱 절박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짧은 게시글을 통해 질문자님이 받으셨다는 예전의 상처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가늠하기는 어려워 안타깝습니다. 다만, 그 때문에 아직도 고통받고 계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질문자님의 지금 그 좌절감은 충분히 느껴지는 듯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우려는,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야만 해!"라는 걱정에 너무 조급해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싶다는 것입니다.

상처는 기억입니다. 직접 경험한 감각이자 기억입니다. 기억은 결코 지울 수 없습니다. 더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남는 상처는 더더욱 잊히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 누구도 상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먼지를 털어내듯 상처를 훌훌 털어내고 잊는다는 것은 기억을 슥슥 지운다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때문에 상처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것을 '완전히 잊고자'하는 것이라면 어쩌면 그건 너무 어려운 목표일지도 모릅니다. 상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 과정이 더욱 절망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잊고 싶어도 저절로 떠오르고, 저절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상처가 그 노력을 매번 꺾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좌절감만 남게 될 수 있습니다.

 

그보다, 우리는 상처를 '놓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 입은 나'를 마음속 깊이 애도하고, 그 이후의 기억들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라는 기억에 매여만 있기보다, 그다음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괴로움과 불안, 좌절이 나의 마음을 끊임없이 과거로, 다시 과거의 그 기억으로 데려갈지 모릅니다. 상처로 되돌아가 그때처럼 불안하고 아파하게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과거의 그 기억을 다시 방문할 때마다, 우리는 좌절하기보다 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여기로 돌아왔어! 나는 이 기억에 파묻혀 버렸어!"라는 좌절보다는 "그래, 내가 이렇게나 많이 괴롭고 힘들었지"라며 스스로를 감싸 안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애도하고, 다시 그다음을 향해, 지금의 이 순간과 기억들을 향해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쉽고 편안한 길은 아닙니다. 상처라는 것부터가 원치 않았던 괴로움 그 자체이니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 질문자님의 곁에 있는 남자 친구처럼 질문자님을 이해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자님 스스로도 남자 친구 덕에 많이 좋아졌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질문자님 스스로가 그 점을 좀 더 집중해서 바라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남자 친구를 보면서도 또다시 믿지 못하고 불안해지는 스스로의 모습보다는, 남자 친구 덕에 더 많이 안정되고 좋아진 스스로의 모습을 말입니다.

상처를 떠나오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걸어왔느냐 보다는,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질문자님께서도 끔찍한 상처를 등지고 이제 새로운 관계를 향해, 새로운 기억들을 향해 나아가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좌절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위로를 건네봐 주는 것은 어떨까요.

질문자님께서 괴로운 기억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더 편안해지실 수 있기를 응원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전문의 홈 가기
  • 애독자 응원 한 마디
  • "선생님처럼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직업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습니다. 정성스런 상담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 자신에게 궁금했던 질문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