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염태성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저는 20대 대학생입니다. 고등학생 때 잠시 우울증 약을 복용한 적이 있고, 최근 들어 갑자기 심해져서 작년부터 다시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상담도 받고 있고요.

대학생활을 하면서 생긴 가장 큰 문제는 어렵고 두려운 일을 피하고 싶고 미루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드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 때문에 실제로 중도에 포기한 일들도 몇 번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마음은 어릴 때부터 있었는데, 주로 대인관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혼자서 아주 기본적인 활동(혼자 미용실 가기 등)을 해야 할 때 그런 마음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런 일에 두려워하고 망설이면서도 결국엔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부담감을 심하게 느껴 중도에 포기하고 끝까지 미루기만 하고 있어 너무 힘이 듭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들고 왜 이런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지 스스로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에는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정말로 하고 싶어서 준비한다기보다는 취업을 대비해서 하는 데다가 공부량은 많고 그러다 보니 하기 싫은 마음이 들었고, 이에 더해 시험에서 특정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결국 그만두었습니다.

학교에서 치르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역시 한편으로는 하기 싫다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망쳐버릴 것 같다는 마음이 계속 충돌해서 시험을 생각만 해도 지쳐 버리더라고요. 간단한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중간에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요즘에는 모든 일이 지겹고 버겁게 느껴집니다.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게으르고 무기력하게 살기만 하는데, 그 와중에도 밥은 먹고 잠은 자는 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요. 이렇게 계속 살다가 인생을 실패해 버릴까 봐 겁이 납니다. 

제가 너무 겁이 많아서 그런 걸까요? 스스로 요구하는 기준이 높아서 그런 걸까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제게 높은 기준을 부여하지 않으면 저 스스로도 자신에게 실망할 것 같고, 또 미래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방이 꽉 막힌 방 안에 갇혀있는 느낌이에요. 답답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은 삶의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는가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최근 계속 미루고 싶고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힘든 것도 있지만,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삶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제가 선택하지 않은 삶인데, 갑작스레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하고 또 그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너무 버겁게 느껴져요. 마치 제가 러닝머신에서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저를 러닝머신 위에 올려놓은 것도 삶이고 러닝머신의 속도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도 삶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건 속도에 맞춰 달리기 위해 애쓰거나 넘어지는 것뿐이죠.

이런 마음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군가는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초점을 옮기라고 하지만, 그리고 저도 그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지만 때로는 너무 힘들고 버거운 삶을 놓아버리고만 싶어요.

부디 답변이나 조언이 달리길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광화문숲 정신과 염태성입니다.

일상적인 일에서의 의욕 저하나 대인관계 어려움, 이로 인한 자책과 무기력, 삶에 대한 허무함 등 복합적인 증상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래의 두 가지 가능성으로 나누어 설명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현재 가지고 계신 우울증에 대한 치료가 충분히 되지 않았을 가능성입니다. 길게 써 주신 내용들은 너무나 전형적인 우울증의 증상들입니다. 지금 다시 약을 복용 중이라고 하셨는데, 약의 종류나 용량 등이 현재 글쓴이분의 상태와 맞지 않거나 부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우울증 치료제로 세로토닌을 조절해주는 항우울제만이 주로 쓰였지만, 요즘은 약들의 다양한 기전과 효과들이 밝혀지면서 다른 정신과 약들이 우울증에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현병이나 조울증의 증상이 전혀 없음에도 이런 목적으로 개발된 약들을 우울증에 쓰는 일이 늘어나고 있고 효능도 점차 입증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위 문제들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투약 조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스스로가 가진 성향 혹은 성격적인 면이 이런 증상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정신과에서는 질병과 달리 생물학적으로 타고나거나 어렸을 때의 경험으로 형성된 개개인의 특질을 성격이라 부르고, 특정 유형의 성격이 두드러져 삶에 지장을 주는 것을 가리켜 성격장애라 부르고 치료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특정 종류의 성격장애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남들에 비해 더 비관적으로,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만약 이쪽의 가능성이 있다면 약물치료도 도움이 되지만 꾸준한 상담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신과에서 하는 상담치료를 정신치료라 부르는데, 분석적인 방향의 정신치료를 지속하면 내가 가진 무의식과 내 성향에 대해 스스로 더 깊게 이해하도록 해 주고, 나아가 세상을 좀 더 행복하게 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 지속 중이신 상담치료가 분석적 정신치료라면 상담을 지속하시길 바라고(분석적 정신치료는 꾸준하게 오랫동안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담치료라면 세팅을 바꾸어 보시는 것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치료 이외에 스스로의 노력도 사소하지만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규칙적인 운동이 뇌의 세로토닌 농도를 안정화시켜 우울증 호전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는 매우 많습니다. 운동 이외에도 생활습관 교정이나 생산적인 취미활동을 통한 자기 계발 등을 시도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생은 본질적으로 허무한 것입니다. 짧은 인류의 역사 동안 수많은 철학자나 석학들이 이에 대해 고민해왔고, 그들의 고민과 나름의 결론이 소위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독서를 통해 삶에 대한 방향과 해답을 찾아보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