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아픔으로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 믿는 당신을 위해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학병원 근무 시절, 응급실 동료 간호사 선생님들은 종종 나를 ‘소설가’ 라 불렀다. 다급한 증상을 처치하기 위해 해당 증상의 경과, 과거력, 동반 질환 등을 간결하게 파악하고 빠르게 적절한 의학적 처치를 시행하는 장소가 응급실이다. 정신과의 경우에도 물론 자살이나 자해 등으로 응급실을 내원한 환자에 대해 다급한 신체적 조치를 하는 것이 선행되겠지만, 이후 환자의 인생 전체 이야기를 청취하고 또 이를 기록으로 정리하는 과정이 추가된다.

아무리 평범한 삶이라도 몇십 년이 쌓이면 그 분량이 상당하다. 일반적으로 파일 1/3장, 반 장 정도를 쓰는 전자 경과기록지 칸이 모자라 서너 장을 넘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급박한 응급실 한편에서 환자의 인생 전체를 복기하고 의무기록에 남기는 모습은, 스스로 돌이켜봐도 참 이질적이다. 한참 동안 컴퓨터와 씨름하는 모습이 흡사 ‘집필’ 과정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 같다.

그렇게 길고 긴 이야기들은, 주로 지금의 내가 이렇게까지 힘든 이유들로 채워져 있다. ‘마치 저는 불행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아요.’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지금 경험하는 고통, 우울, 불안, 절망의 원인을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럴듯한 심리적 이론을 빌려 그 인과관계를 더욱 치밀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예컨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은 이후로는 더 이상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었어요.’라거나, ‘반복해서 실패를 겪다 보니,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어요.’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단편적인 몇 번의 경험이 아니라 몇 시간을 써 내려도 시간이 모자라는, 삶 전체에 관한 것이다. 환자들의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생각 속에서 검토되어 상당히 타당한 논리와 인과관계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떠나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공감 갈 만큼 설득력이 있다. 그렇기에 처음 이러한 이야기들을 접했을 때는 어떻게 면담을 풀어가면 좋을지 막막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명료한 설명을 원한다. 나의 바람, 소망과 일치하지 않는 현실을 맞이할 때는 더욱 그렇다. 행복하고 싶은데 자꾸만 우울할 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지만 점점 더 미워질 때, 우리는 마음이 그렇게 되는 이유, 삶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명확한 원인을 알고 싶어 한다. 원인을 알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고서.

프로이트로부터 태동한 정신분석학은, 우리에게 무의식이라는 놀라운 깨달음을 선사했다. 우리의 마음은 의식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과 본능으로부터 형성된 무의식의 어마어마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발견에 대한 오해는 자칫, 우리의 마음을 지나치게 환원론적이고 결정론적으로 이해하는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즉, 지금 겪는 마음의 고통은 전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러한 경험들로부터 마음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변하기 힘들다고 결론짓는 오해다. 지금의 우울과 불안이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결정되었다고 간주하거나, 삶이 힘들어진 모든 이유가 어떤 특정한 마음의 상처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러한 경향의 예다.

 

사진_픽사베이

 

그러한 경향이 옳다, 그르다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샌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현재를 전적으로 과거의 어떤 원인으로부터 설명하려는 경향성 그 자체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논하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당신의 우울은 까마득히 어린 시절 부모의 방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을 수도 있고, 성장기에 겪었던 큰 사고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에 기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치료적 관점에서 이러한 역동을 잘 설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치료자의 입장, 나를 관찰하는 타인의 입장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나 자신의 입장에서 이러한 경향은 지나친 부정적 자기예언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으로 ‘결정지어’ 졌고, 이러한 결정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오늘의 내가 이렇게 힘든 원인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싶은 이유는 결국 근본 원인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내일, 행복한 내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의 아픔으로 몰입하면 할수록, 그때의 기억을 지우거나 돌이킬 방법은 없기에 ‘나는 앞으로도 불행할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말하자면 나의 과거가 오늘의 나에게 ‘너는 이랬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슬픈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거야.’라 끊임없이 설득하는 것과 같다.

삶의 매 순간을 완벽하게 보낼 수 있었던 이는 누구도 없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상처를 마음속에 품고 산다. 크고 작음의 차이, 주관적인 아픔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스스로만 알 수 있는 깊은 마음속 상처가 있다. 물론 상처는 삶을 어렵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픈 기억을 품은 모든 이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며, 모든 행복한 이들의 마음속에도 아픔이 존재한다. 상처 받은 이도 행복할 수 있다. 아픔이 있는 이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그러므로’가 아닌 ‘그렇다면’의 관점을 제시하고 싶다. 혹 당신의 과거가 힘들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앞으로도 힘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반복하고, 그 생각을 떠올리며 또다시 힘든 오늘을 보내진 않았는지. 만약 그랬다면, 그 대신 나의 과거는 힘들었지만, ‘그렇다면’ 오늘부터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떻게 나아갈지를 꿈꿔 보기를 바란다. 물론 행복을 꿈꾼다고 해서, 원하는 삶을 상상한다고 해서 당장 그러한 삶이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거의 아픔이 자꾸만 속삭이는 ‘오늘도 힘들 수밖에 없는 이유’에 설득당하며 소중한 ‘현재’를 소진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 대신 과거의 아픔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원하는 삶의 모습으로 다가가기 위해 오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떠올리는 시간들로 오늘을 채우기를 권한다.

그리고, 당신이 어느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원했든 그렇지 않았든 지금까지 굳어진 익숙한 삶의 패턴에서 벗어나, 원하는 삶을 위한 하루를 시도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이는 아무리 마음이 단단한 이 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던 이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 실패의 두려움을 딛고 도전하는 것, 아무것도 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마음을 딛고 원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문턱 앞에서 다시금 도망칠 수도 있고, 흡족한 결과를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 불안이나 공황 발작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괜찮다. 이미 당신은, 언젠가는 경험했어야 할 시도를 마침내 해낸 것이다. 필요하다면 정신건강의학과에 들러 증상을 다독이거나, 살아가는 조언을 구해도 좋다. 힘들다는 것이 틀렸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지금의 불안은 어린 시절의 아픔 때문이고, 그러므로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을 거야.’라는 관점이 아니라, ‘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해, 그런데 이런 증상이 불편하네. 그렇다면 어떻게 조절하면 좋을까?’라는 관점으로 삶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에 대한 답은 체념이지만, 그렇다면 에 대한 답은 새로운 가능성이다.

 

과거를 바꿀 수 없다고 했지만, 실은 딱 한 가지 방법이 있다. 한결 평온하고 행복해진 마음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오늘을 위한 시간이었구나’라 떠올릴 때, 내 마음속 과거는 바뀐다. 그때가 언제일지, 까마득하기만 할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삶의 시간은 길다. 아득히 멀어 보이는 길도, 지금 한걸음에 집중하며 천천히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도달하곤 하는 것이 삶이다. 더욱이 행복이란 어느 위치에 도달해야만 느낄 수 있는 열매가 아니라,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갈 때 스치는 바람의 상쾌함 같은 것이다.​

오래된 아픔을 떠올리며 눈물짓던 당신의 오늘들이, 새로운 행복을 위해 다가가는 시간들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물들어 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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