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中)

 

누구나 연애에 관해서는 흑역사가 있다. 나의 경우에는, 어릴 적 오래도록 혼자 좋아했던 친구에게 했던 바보 같은 고백이 생각난다.

‘내가 이렇게나 너를 좋아하니까, 너는 나와 사귀면 제일 행복할 거야.’

혹시 이 글을 읽는 이 중에, 비슷한 식으로 고백을 하려는 이가 있는지. 만약 있다면 멘트를 조금 더 세련되게 정돈하기를 권한다. (경험 상,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나의 문제, 그가 나를 좋아하는 건 그의 문제이며, 함께 하는 행복은 우리의 문제이기에 나의 문제만으로 답을 낼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당신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보다는, 그가 당신과 함께한다면 얼마나 행복할지이다.

우여곡절 끝에 연애를 하다 보면, 만나기 전 겉으로 드러나는 빛나는 모습들에 가려져 있던 그들의 그림자도 마주하게 된다. 숨겨진 삶의 질곡이 깊을수록 이를 보듬어주고픈 마음도 커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지나칠수록 무리하고, 참고,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과 해결할 수 없는 그의 삶의 문제로 인해 지치고, 종국에는 그에게서 마음이 떠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곤경에 처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정도를 넘어, 그의 절망에 대한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구원 환상, 구조 환상(rescue fantasy)이라 한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처럼, 단순히 돕고 싶다는 차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유일한 삶의 구원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다.

이러한 구원 환상은 다양한 곳에서 관찰된다. 난치의 환자를 치유하려는 의사, 모두가 포기한 아이를 교육하려는 스승, 불행으로 점철된 상대의 삶을 구원해 주려는 연인. 기사화되거나 방송에 소개되어 두고두고 미담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많지만, 우리는 이러한 시도들이 모두 아름다운 결말만 맞는 건 아님을 알고 있다.

예컨대, 여기 한 연인이 있다. 아픔을 안고 있는 이와 이를 감싸주려는 이. 그들의 시작은 아름답다. 허나 아름다운 시간이 생긴다고 해서 상처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보듬으려는 이는 ‘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너를 돌보고 아끼는데도 왜 계속 아프니.’라며 답답해하고, 아픈 이는 ‘내 아픔이 이렇게나 깊다는 것을 너는 이해해 줄 줄 알았어.’라며 야속해한다.

그는 상대를 구원하고자 했으나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음에 좌절을 하고, 또 다른 그는 비로소 의지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고 생각했으나, 이전에 자신을 구원하겠다며 다가온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절망한다. 그들은 각자 생각한다.

‘나는 그를 구원하지 못했어.’
‘나는 또다시 구원받지 못했어.’

 

사진_픽셀

 

힘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겠다는, 얼핏 보기에 좋은 마음만 가득해 보이는 이러한 환상이 어째서 아름다운 결말로만 이어지지 않는 걸까. 문제는 정도다. 타인의 삶에 크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과, 그의 삶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되었기에 이를 구원해 주겠다는 마음은, 실은 다른 마음일 수 있다.

구원 환상의 아래에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과대한 이상적 자아상과, 스스로의 전능감을 확인하려는 마음이 숨어 있다. 과대한 자기 이미지는 세상의 기준, 스스로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발생하는 열등감의 반작용인 경우가 많다.

 

자존감은 타인이나 세간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이 높은 이들은 자신의 부족한 부분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이는 그들이 외적으로 겸손해 보이는 이유다. 이에 비해 자존심 즉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은, 스스로는 내적으로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스스로는 자신의 모습을 납득하기는 힘들기에 타인이 인정과 긍정이 필요한 마음, 이는 구원 환상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오래도록 힘겨웠던 누군가의 삶에 행복을 주는 일. 지금껏 누구도 해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이는 그 일을 해냄으로써 나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고 세간의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구원 환상 속에 숨어있다.

‘다른 이는 그를 감내하기에 부족하지만 나는 가능하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전능감과 ‘나만큼 그에게 진실한 사랑을 하는 이는 없다, 그를 위하는 이는 없다.’라는 낭만적인 자기상이 겹칠 때, 구원 환상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다 보면, 상대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 그의 행복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를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는지’에 나의 초점이 옮겨지게 된다.

마음의 상처는 몇 마디의 따뜻한 말과 다정한 손길 정도로 해결되기엔 지나치게 깊고 복잡한 경우가 많다. 겉으로 보았을 때 그 슬픔이 간단하고 얕아 보인다면, 실제로 그 아픔이 그래서이기보다는 충분히 표현되지 못하거나, 굳이 표현하기 싫어서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관계가 내 전능의 시험대가 되면, 그의 아픔을 충분히 바라봐 주지 못하고, 기다려 주지 못한다. 내 생각대로 행복해지지 않는 그와 아름다워지지 않는 우리의 관계를 탓하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게 된다.

 

당연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해 주고픈 마음이 모두 비현실적인 환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이, 파국으로 이를 가능성이 높은 구원 환상인지, 아니면 너와 나 우리를 모두 행복으로 이끄는 이타적 마음인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간단하다. 나의 역할이 없어도, 나와 함께가 아니라도 상대가 행복할 수 있을 때, 이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의사라면 누구나 자신의 환자가 쾌차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내가 잘 치료하지 못했던 환자가 다른 의사와 치료를 진행하며 경과가 좋아졌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내 마음이 진심으로 환자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면 어느 환경에서든 그가 치유되었음이 기쁠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나의 능력을 확인하고 환자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마음이었다면, 다른 의사의 손을 통해 치유된 환자를 보는 마음은 불편할 것이다.

연인 관계에도 같은 은유가 적용된다. '너를 사랑해.' '행복하게 해 줄게.'라고 표현하는 말속에 '너는 나와 함께 해야만 해.' '나와 함께 하는 게 네게 가장 행복이야.'라는 속심이 포함되어 있다면 이는 구원 환상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은 당연하다. 다만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어, 그가 영원히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라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에 비해 조금 불행할지 몰라도,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더 행복할 리가 없다.’라는 마음이 사랑이란 이름 아래 숨겨져 있지 않은지 항상 생각해야 한다.

그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이 커 더 이상 나와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이 아닌 이를 억지로 잡는 마음과, 그가 나와의 삶을 더 이상 그리고 있지 않을 때 더욱 행복할 그를 상상하며 보내주는 마음, 어떤 마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에 더욱 가까울까. 내가 그를 구원하지 않아도 그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마음. 내가 가진 여러 사랑의 정의 중 하나이다.

 

사진_픽사베이

 

구원 환상에 대해 이해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직업 상 나를 찾았던 마음이 지친 이들, 그리고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내 삶에 들린 많은 이들의 아픔, 어려움을 내 삶의 오류, 해결해야 할 과제로 간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글을 쓰며 옛 기억을 더듬어 본다. 마음을 스치고 가는 이들,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들을 사랑했던 걸까, 아니면 그들과 사랑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내 마음에 갇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지금은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는 그들이 진심으로, 그들이 그리는 모습대로의 행복과 함께하고 있기를 바란다.

 

살아가는 건 분명 때로 지치는 일이다. 그 고단함을 누군가가 대신 짊어지는 건 불가능하다. 그 엄정함이 두려울 때도, 슬플 때도 있다. 살아가는 건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곁을 지킬 수 있다. 열이 날 때 이마를 닦아 주고, 다리가 부러졌을 때 어깨를 기댈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구원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수는 있다.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자일 수 없다는 말은,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문장 자체만큼 불친절하고 삭막한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불현듯 마음을 찢는 이 아픔을 한 순간에 없애줄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러니 오늘은 내가 너를, 내일은 네가 나를,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자. 요행히 너와 내가 아프지 않고 함께 웃던 날, 그 날을 추억하며 그렇게 살아가자.

 

세상에 구원이란 없다. 이를 되새기며 서로를 서로의 식대로 이끌거나 이끌리지 아니하고, 단지 웃을 때 진심으로 함께 웃으면 어떨까. 아플 때 함께 아프고, 기쁘다고 다가가지도 아프다고 멀어지지도 않은 채 서로의 곁을 지킨다면 어떨까. 이 정도라면, 서로에게는 충분히 구원이지 않을까. 아니, 구원은 아니더라도, 사랑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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