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본 글은 자살 유가족 대상 강연 자료를 각색한 글입니다.)

 

‘여러 빈소에서 여러 죽음을 조문하면서도 나는 죽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 없다.’

(김훈, 연필로 쓰기 中, 문학동네, 2019)

 

자의로든 타의로든 사람은 살며 자신의 경험을 남긴다. 사소한 일상은 책이 되고 노래가 되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 누구나 처음인 삶,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일상과 비교하고 베끼며 배우고 위로받는다.

하지만 죽음만은 도무지 배울 수가 없다. 죽음을 경험하고 삶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임사 체험, 즉 죽음의 곁을 방문했다 돌아온 이들의 경험담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은, 죽음에 임박할 정도의 신체적 변화로 인한 뇌의 산소 결핍, 화학적 상태 변화로 인한 이상 지각이다.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다. 누구도 죽음을 미리 겪고 그 경험에 대해 논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한계가 오히려 죽음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처녀와 총각으로 죽은 이들은 죽어서라도 맺어줘야 한이 없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세상을 떠돌며 한 맺힌 사람의 꿈에 나타난다. 얼핏 들었을 때 그저 미신만 같고 맞을 리가 없을 것 같은 말들도, 잘 생각해 보면 틀렸다 증명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

과학은 타당한 가설과 실험을 통한 입증, 이를 같은 조건에서 재현할 수 있는지를 통해 성립된다. 죽음은 어떠한 가설도, 재현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한 관점으로 볼 때 죽음에 대한 여러 생각들은 과학적이지도, 비과학적이지도 않다. 다만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을 뿐이다.

지금의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사고과정 중 가장 합리적인 과학의 틀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의 모호함은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의 씨앗이 된다.

 

사진_픽사베이

 

애도반응(bereavement)은 죽음으로 인한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따르는 반응을 의미한다. 애착이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존 볼비는 죽음을 맞이한 유가족의 애도(bereavement)를 다음 4단계로 정리하였다.

1단계, 초기 절망(acute despair)의 단계
: 수일에서 수 주 간 지속되며, 죽음을 믿을 수 없어(disbelief) 이를 부인하고 저항하거나 멍해진다.(numbness) 

2단계, 강한 그리움(intense yearning and searching)의 단계
: 수주에서 수개월간 지속되며 고인과 연관된 장소를 찾거나 유품을 보는 등, 그에 대한 강한 그리움에 빠진다.

3단계, 와해와 절망(phase of disorganization and despair)의 단계
: 수개월 간 지속되며, 어떠한 시도로도 죽음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달으며 깊은 절망과 허무를 느낀다. 의욕과 감동을 상실하고 목표나 삶의 동기를 잃기도 한다.

4단계, 회복, 재통합(reorganization)의 단계
: 수개월에서 수년 간 지속되며,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다시금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오래도록 남은 자의 마음에 깊은 영향을 준다. 사별은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발생하는 결별이며,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했을 누군가를 제외하고는 살아가며 반드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아픔이다. 또한 죽음은 다른 여러 이별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단절이며, 그 압도적인 막막함 앞에서 우리는 너무도 무력하다.

 

애도는 그 자체로 정상적인 반응이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거나 지속되는 기간이 지나치게 길다면 삶에 큰 지장을 줄 수 있다. 특히 자살이나 타살, 사고 등 갑작스럽고 예측하지 못한 죽음의 경우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다. 산 사람의 삶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게 하는 여러 생각과 감정들, 그중에서도 진료실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죄책감이었다.

‘그때 이야기를 더 들어줬어야 하는데.’
‘처음 아프다고 했을 때 병원을 갔어야 하는데.’
‘조금 더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

만약으로 시작하는, 고인에게 부족했던 기억에 대한 미안함이 시간이 지나며 점점 증폭되어 죄책감이 되고, 점점 가슴을 파고들며 이별의 아픔을 더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종국에는 죽음 자체가 살아남은 이들의 탓인 것만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가 잘못이 된다.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들이 이러한 마음을 다독이기는 힘들다. 그렇지 않다고 위로해 줄 단 한 사람은, 이제 세상에 없다.

 

죽은 이는 말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떠난 이의 입을 빌려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한다. 조금만 더 행복했다면 좋았을 걸, 이렇게 갈 거라면 아프지라도 말지, 고생만 하다가 실컷 가서 한이 되어서 어떡하나.

그에게 국한된 이야기라면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프다. 나와 연관된 안타까운 말들은 더욱 가슴을 저며 온다. 더 잘해줄걸, 아껴줄걸, 사랑한다고 말할걸. 되돌릴 수 있는 어떠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압도적인 막막함, 느껴 보지 못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급체로 응급실을 오셨었다. 집안에 의료인은 아무도 없었다. 의사면허를 따기 위해 국가고시를 공부하던 시절이라 나 역시 아직 의료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작 학생에 불과하던 나 이외 의료계에 몸담은 이가 전혀 없는 관계로, 할아버지는 나를 연고로 모교 병원의 응급실을 방문하셨다.

공부를 핑계로 오셨을 때 얼굴만 한 번 뵙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혈액검사상 특별한 소견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집에 돌아와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는데, 평소 전화가 울리지 않는 시간에 연락이 왔다. 낯선 벨소리만으로 이미 나는 많은 것을 예감했다.

병원에 당도했을 때 이미 할아버지는 의식이 없으셨다. 평소 심혈관이 좋지 못하던 할아버지는 여러 차례 위험한 시기가 있었었다. 이로 인해 이전에 여러 번 심혈관 스텐트 시술을 받으셨는데, 거기서 발생한 다수의 색전(피딱지 조각)이 전신에 퍼져 장간막 동맥을 막아 장에 문제를 일으켰다가 이제는 뇌혈관을 막아 생명을 위협 중이었다.

평소 연명 치료는 당신 스스로도, 가족 중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급히 기관 삽관을 할 것인지 말지를 결정해 달라는 새파란 전공의의 다그침에는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급한 설명에 경과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나뿐이었으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식이었다. 모두가 말을 잃은 죄인이었고 사촌 형이 십자가를 대신 졌다.

“기도 그거 하지 마세요.”

 

그땐 하늘 같은 선배였지만 지금의 나보다는 어린 이름 모를 내과 레지던트의, 잊을 수 없는 답답한 눈초리를 지금은 이해한다. 그는 할아버지를 살리거나 혹은 그리하지 않은 다음,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들에게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에게, 죽음은 단지 살리거나 혹은 그리하지 않기로 정하는 문제는 아니다.

미안했다. 할아버지에게 계속 미안했다. 평소 진료를 보실 때 조금 더 관심을 가졌다면, 나의 공부가 조금 더 깊었다면, 시험 핑계를 대지 않고 조금 더 꼼꼼히 검사 결과와 상황을 살폈더라면 혹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지금은 안다. 그 죽음에 연관된 모든 이들이 최선을 다했고, 내게 달린 영향은 지나치게 미미했다는 것을.

되돌아보면 나의 죄책감은 은유였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내 어린 시절의 많은 시간을 채워주셨던 할아버지. 감사하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 더 이상 감사할 기회도, 사랑할 기회도 없다. 언젠간 이런 순간이 올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않는 것이 전하는 것보다 덜 민망해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짧은 한마디를 드리지 못했다.

 

사진_픽사베이

 

만약 영혼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먼저 죽어 아직 살아있는 사랑하는 이의 꿈에 나타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까. 아마도 여기도 괜찮다고. 남은 당신이 불행하기를 내가 왜 바라겠냐고 하지 않을까. 본디 함께 살아가는 건 서로 미안하고 고마워하는 것이라고, 단지 먼저 왔을 뿐이니 너는 남은 생을 충분히 즐기다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이야기할 것 같다.

혹 죽음으로 헤어진 누군가에 대해 미안함이 크다면, 죄책감에 잠 못 이룬다면, 진심으로 그를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돌이켜보면 어떨까. 죄책감에 젖어있기보다, 미안함을 내려 두고 다시금 내 삶을 사랑하는 것이 그를 위하는 것은 아닐까. 진심으로 미안하다면 미안함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행복하는 것이,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를 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 모르겠다.

 

외할아버지는 다정한 편은 아니셨다. 밖으로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 없는 무심한 분이셨지만, 늘 웃으셨고 드러나지 않게 챙겨주시곤 했다.

“얼씨구, 좋아하시네.”

자주 쓰시던 말이다. 갑갑한 뉴스의 정치 소식을 보실 때면, 가식, 허례허식이 느껴질 때면 감탄사처럼 붙이시던 말이다.

 

만약 이 글을 읽으신다면 역시 한마디 하실 것 같다.

“얼씨구, 좋아하시네.”

쓸데없는 소리는 접어두고, 잘 살아라, 그렇게 이야기를 덧붙이실 것 같다.

 

할아버지가 비벼주시던 계란 간장밥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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