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못할까 봐 시작조차 못하는 마음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점심 메뉴 선정은 언제나 힘들다. 제육을 먹자니 돈가스가 끌리고, 돈가스 집을 가려니 짬뽕이 눈에 아른거린다. 아직 남은 회식자리의 술기운을 지우자는 합리적인 이유 하나를 겨우 찾아 중국집으로 향한다.

메뉴판은 또 다른 시련이다. 오로지 짬뽕만을 떠올리며 자신 있게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에서 면치기를 시전하며 간짜장을 흡입 중이다. 불현듯 양파의 식감과 라드에 구운, 흰자가 조금 바삭한 계란 후라이의 고소함이 땡긴다. 해장에 무슨 짜장이야, 자신 있게 짬뽕을 시키려 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다.

결국 간짜장을 시켰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음식이 나오자마자 동료가 시킨 짬뽕에 다시금 시선을 빼앗긴다. 지금 먹고 있는 간짜장의 맛은 잘 알지도 못하겠다. 짜장이 맛있어서 기쁘거나 맛없어서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은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짬뽕을 먹을 걸, 저 짬뽕은 얼마나 맛있을까'에만 신경을 빼앗긴다.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가 없다.

이렇듯 무엇을 먹을까 하나에도 수천 번의 고민을 반복하는 우리다. 얼핏 같은 밥을 뭘로 먹을 것이냐 하는 하찮은 문제처럼 보인다. 허나 이는 들여다보면 한정된 돈으로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가장 아름답게 채울 것인지를 고민하는, 실은 꽤나 심오한 문제다. 

 

삶의 모든 선택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심지어 언제 마무리될지조차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들 중 세상이 내게 허락하는 것은 언제나 극히 일부다.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자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만큼 절대적인 원리는,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정된 자원으로,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에 대한 선택을 해야 한다. 점심 결정뿐 아니라 어느 대학에 갈 것인지, 한 번뿐인 젊음을 어떤 커리어로 채울 것인지, 결혼은 할 것인지, 누구와 할 것인지, 자녀를 낳을 것인지, 얼마나 낳을 것인지 등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고, 가진 것은 늘 부족하며, 흘러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삶의 선택은 늘 어렵다.

 

사진_픽사베이

 

우리의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음 세 가지 정도의 생각이 아닐까 한다.

그 첫 번째 생각은 ‘완벽에 대한 강박’이다. 

우리가 자라온 환경, 교육과정은 답을 찾는 연속이었다. 문제가 주어지면 정해진 알맞은 해답을 찾고, 가장 많이 답을 찾은 이가 많은 기회와 보상을 얻는 구조이다. 그렇게 배우며 자란 우리는, 삶의 선택지를 고를 때도 같은 양식으로 접근한다. 

즉, 살아가며 결정할 순간마다 우리는 여러 선택들 중 가장 적합한 답이 있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삶의 선택은 시험과 다르다. 명확한 답이 있는 선택, 즉 장점만 있는 것을 그렇지 않은 것 중 고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선택이 아니다. 

무엇을 고른다는 것은, 각기 장단점이 존재하고 그 합이 비슷한 여러 갈림길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이 학과를 택하자니 저 학과의 취업률이 눈에 보이고, 일이 편한 이 직장을 지원하려니 저쪽의 연봉이 아쉬운 것이 삶의 선택이다. 찬찬히 살펴보고 고심한다고 해서 정답과 오답을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모호한 선택지 앞에서, 좀 더 알아보고 고민하면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결정을 주저하고 미루게 된다. 

 

두 번째는 ‘기회비용에 대한 이상화’다. 짜장면을 시켰으나 옆자리의 짬뽕이 문득 너무나도 완벽해 보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참지 못해 기어이 짬뽕을 한 입 얻어먹어보면 알게 된다. 그 맛 역시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님을.  

애초에 짜장면과 짬뽕을 고민했던 이유는 둘 다 고만고만하게 맛있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삶의 길에는 각기의 장단점이 있다. 가지 않은 삶의 길은, 아쉽게도 짬뽕을 얻어먹는 것처럼 쉽게 걸어보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매스컴으로, 책으로, 대화로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익히 알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멋져 보이기만 한 이의 내면에도 남모를 고뇌가 있고, 얼핏 힘들고 고단해 보이는 이에게도 그만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SNS, 유튜브와 같은 여러 매체들을 통해 화려함은 포장되어 드러나고 아픔은 가려지는 요즘이다. 내가 걷는 길의 고난은 드러나지 않는 다른 이들의 슬픔보다 유달리 고단해 보이고, 내가 가지 않은 길의 환희는 나의 소소한 행복보다 유난히 멋져 보인다. 

사람의 마음에는 이득보다도 손해를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그때의 선택만 달랐다면 지금 이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나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가지지 못하는 화려함과 누구나 겪는 삶의 고난이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손해인 양 느껴질수록 다음 선택에 고민이 많아지고, 섣불리 나아가기 힘들어진다.

 

마지막은 ‘최선을 다해도 완벽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과감한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길이 생각했던 길이든 그렇지 않은 길이든, 꾸준히 그 길 위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 묘한 생각이 자라난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혹은 시작을 하지 않으면 ‘아직’ 기회가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막상 선택을 하고, 최선을 다했으나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을 때의 상실감이 두려운 것이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시작을 하지 않으면 적어도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도 도달하지 못할 때의 허탈함이 지레 겁이 날 때, 선택하지 않았기에 역으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안심이 될 때, 우리는 선택을 주저하게 된다. 

 

우리는 마치 어떠한 결정이 삶 전체를 규정할 듯이 생각하지만 개개의 선택은, 실은 그 자체로는 그리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합치면 애초에 비슷하기 때문에 선택의 문제가 되고 고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을 이루는 것은 선택 자체가 아니라 그 선택에 따르는 실천이다. 

나아가는 방향을 정했다고 해서 결말에 도달할 수 없다. 어떻게 꾸준히 나아갈 것인가는, 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보다 더욱 심오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삶에 정답은 없으므로, 스스로, 그리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삶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방향도 정답이기 때문이다.

 

사진_픽사베이

 

얼핏 부러워 보이는 짬뽕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내 앞의 간짜장의, 라드에 잘 볶인 고소한 춘장의 맛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메뉴 선정이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렇기에, 오랜만에 찾아온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이 한 그릇이 고스란히 고마웠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수십만원짜리 호텔 탕수육을 먹는 사진이 SNS에 올라온들 무슨 상관이랴. 행복은 내가 고른 간짜장이 옆 사람의 짬뽕보다, 사진 속 화려한 음식들보다도 완벽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메뉴와는 상관없이 오늘의 짜장 속 유달리 실한 돼지고기를 발견할 때 온다.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가장 이상적인 답을 고를 때가 아니라, 매번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주어진 나의 길에 몰입할 때 온다. 

선택의 기로에서 오늘도 망설이는 중이라면 고민 자체가 어느 쪽으로 나아가도 괜찮다는 증거임을 떠올리고, 그나마 나은 쪽으로 첫 발을 디뎌 보자. 그리고 때론 선택에 고민이 되더라도, 꾸준히 그때그때의 최선의 한 발자국을 내디뎌 보자. 

 

끝없이 뭘 먹을지 고민만 하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짧은 점심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버리고, 종국에는 부랴부랴 대충 선택을 하거나, 아예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단호하게 메뉴 선택을 한다고 해서 일 년 내내 백발백중 마음에 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거를 수 없는 점심처럼 삶을 꾸준히 먹어내다 보면, 종종 마음에 드는 한 끼의 기쁨 같은 소소한 행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혹은 지치지 않고 차근차근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인생 맛집 같은 나만의 삶을 찾아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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