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전념치료(acceptance and commitment therapy)가 전하는, 마음의 고통을 다루는 관점

[정신의학신문 : 이두형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당신은 어미 고양이다. 얼마 전 새끼 고양이 다섯 남매를 낳았다. 솜뭉치들이 야옹거리며 서로 엉켜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는 당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그런데 다섯 번째 막내 아이가 유독 모자라다. 마당에서 잘 뛰놀다가도 혼자 사라지기 일쑤고, 밥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다른 남매들에게 치여 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운동능력이 부족해 구덩이에 빠지거나 오른 나무에서 내려오질 못하는 등, 자꾸만 사고를 친다.

오늘은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는 막내 녀석, 불안해진 당신은 급히 아이를 찾아 나선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사고뭉치. 화도 나지만 그 이상으로 너무 걱정이 된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혹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그때 희미하게 마당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 난간에 허리가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아이를 찾은 당신은 목덜미를 물어 젖먹이를 끄집어낸다. 어미를 향해 앙앙 울며 안겨드는 막내, 다른 번듯한 아이들에 비해 모자란 이 아픈 손가락을 당신은 어떻게 대할 것인가.

 

사진_픽사베이

 

세상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면이 완벽한 사람은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사람도 없다. 대개 우리의 많은 면은 그저 그렇고, 몇몇 부분은 꽤나 괜찮고, 어떤 부분은 참 별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모든 마음이 긍정의 에너지만으로 차오르는 사람은 없다(그래 보이거나, 스스로 그렇다고 믿는 사람들은 많다.).

마음의 많은 부분은 심드렁하고, 몇몇은 열정적이거나 헌신적이다. 그런가 하면 꽤나 많은 부분이 우울하고, 불안하며, 두렵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원하지 않는 영역의 농도가 과하게 짙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울, 불안, 초조, 공포...

건강하고 단단한 내 내면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 약하고 무력한 영역들이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속의, 모자란 다섯 번째 아기 고양이다. 어미가 길 잃은 막내 고양이에게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니.’라며 윽박지르고 화를 내듯, 우리는 보통 스스로의 힘든 마음을 비난한다.

‘또 시작이야, 도대체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는 거야, 이제는 그만 힘들고 정신 좀 차려.’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한 친구의 고민을 들어줄 때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우리가 유독 자기 자신의 아픔에는 냉정하고 가혹하다. 얼핏 ‘남일이니까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고 내 일이니까 어렵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 일, 내 마음이기에 더 따뜻하게 대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미우나 고우나 나의 일부, 막내 아기 고양이와 같은 힘든 마음을 보듬지 못하고 오히려 쥐어박고 혐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것만 아니면 내 삶이 훨씬 나을 텐데.’라는 마음이 아닐까 한다.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다. 약점, 콤플렉스, 증상, 괴로움 등으로 표현되는 은밀한 고통이다. 다섯 마리 아기 고양이 중 막내 같은 존재다. 다른 고양이들처럼 자랑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성가시며, 삶에 방해가 된다.

말 안 듣는 막내 고양이는 삶이 야속한 원인이자 이유가 된다.

‘저것 때문에 내 인생이 이래.’
‘저것만 없었으면 삶이 참 괜찮았을 거야.’

평소 우리가 하는 말로 옮기자면

‘내가 조금만 덜 게을렀으면 뭐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우울증만 없어도 참 행복할 텐데.’
‘공황만 해결되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비단 증상뿐 아니라 삶 전체에 대한 말로도 바꿀 수 있다.

‘어릴 적에 가족이 화목하기만 했으면 내 삶이 괜찮았을 텐데.’
‘그때 그 일만 없었다면 지금 마음이 편안할 텐데.’
‘그 사람만 아니면 다 좋을 텐데.’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마음의 고통과 아픈 기억들은 참 밉다. 저것만 아니었어도 오늘이 행복하거나, 최소한 이 정도로 울적하진 않았을 것이란 마음이 스스로의 고통을 더욱 비난하고 외면하게 한다. 길 잃은 아기 고양이를 겨우 찾았을 때 더 화를 내고 윽박지르게 하는 마음이다.

그럴수록 아기 고양이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 잡을까? 오히려 서러움에 더 악을 지르고 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속, 철없고 상처 받은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은 외면할수록 더 크게 운다. 왜 나 스스로마저 내 마음을 몰라 주냐고, 저 자신은 너 스스로가 왜 이렇게 슬퍼하는지 알지 않냐고.

말썽꾸러기 고양이는 자신이 말썽을 피우는지조차 모른다. 어미를 화나게 하려 하거나 일을 망치려 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길을 잃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길을 잃고, 접시가 엎질러질 것이란 예상도 하지 못한 채 장난을 치다 우유를 쏟는다.

힘든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이루어지는 원리, 뇌의 생리 때문에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아도 될 때라도 슬펐던 기억에 잠긴다. 충분히 안전한 상태에서도 두려움을 느끼고, 초연히 대처하면 좋을 법할 때도 침착하지 못하고 초조해한다.

 

길 잃은 두려움에 가득 차 오들오들 떠는 막내를 찾았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잘못에 대해 윽박지르고 이유를 추궁하는 것일까? 아니다. 우선 안아주어야 한다. 핥아주고 쓰다듬어주어야 한다. 안전한 장소를 벗어나는 것은 위험하니 다음엔 그러지 않도록 훈육해야겠지만, 그것은 적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은 진정된 다음의 일이다. 걱정되고 화가 난다는 이유로 험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재발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외려 아기 고양이의 마음속에 어미마저 자신에게 매몰차다는 상처가 하나 더 남을지도 모른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이든, 정신분석적이든, 마음의 고통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득 우울하고 불안해진다는 것은  그간 마음 한구석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던, 마음속 어린 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다. 우리는 으레 그때마다 화를 낸다.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그만 울 때도 되지 않았냐고, 조금 살 만하다 싶을 때마다 이렇게 나를 괴롭히냐고.

하지만 조금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힘든 마음을 스스로 진심으로 위로한 경험은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없었으면 좋을 상처, 숨기고 싶은 아픔을 온전히 바라보며 힘든 나 자신을 위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오히려 그 고통 때문에 슬픔을 넘어 화가 나고, 혹여 남들에게 들킬까 봐 숨기고만 싶다.

 

사진_픽셀

 

위로의 방법은 진심 어린 이해다. 사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나 스스로는 항상 그때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을. 슬프고 싶어서 슬펐던 적은 없으며 행복하고 싶지 않아서 불행했던 적은 없음을. 그저 외면하고만 싶었던 아픔과 마주하며 담담하게,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땐 너무 어려서 어쩔 수 없었지?’
‘지금 돌아보면 답답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견뎌줘서 고마워.’
‘그저 지금 이렇게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
‘나도 노력해 볼게. 앞으로 같이 행복하자.’

 

이 글이 ‘당신의 아픔은 실은 별 것이 아니다, 마음의 고통은 마음먹기 나름이다.’라는 메시지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자주 행복할 수도 있지만, 가끔은 아플 수밖에 없다. 다만 아기 고양이를 다독이듯 우리의 아픔을 마주하고 위로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 그 아픔을 쓰다듬을 때 진심으로 마음이 쉰다.

그래서 수용이다. 삶에는 본디 고통도 있음을, 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며 어쩔 수 없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살다 보면 아픔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념이다. 아픔의 소멸이 곧 행복은 아니다. 고통은 그대로 수용하고 다독이며 일이든 사람이든 사랑이든, 내 삶의 의미와 닿아있는 무언가에 전념하는 것이 행복이다. 세상 누구라도, 어떠한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도 행복할 권리, 그리고 이를 위해 전념할 권리가 있다.

나와 당신, 이 글을 읽는 모두는 행복할 수 있다. 길 잃은 마음속 아기 고양이를 핥아주는 일, 외면했던 상처를 마주하고 쓰다듬는 일이 그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덧붙여.

만약, 바람대로 눈엣가시인 막내 고양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평화로워질까? 어쩌면, 그동안 너무 설치는 막내에 가려져 있던 넷째, 셋째 녀석들의 부족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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