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로 바라본 세상 이야기 9

[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본 글에는 영화 ⌜기생충⌟과 관련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생충 봤습니다. 하지만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뭔가 답답하고 찝찝하고 무거운 것이 느껴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바로 캐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그 무거움의 알맹이가 정리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영화를 본 지 열흘이 지난 지금 이렇게 제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기생충을 관람하기 전부터 기생충이 ‘빈부격차’에 대해 다루는 영화라는 정보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보고 싶었던 영화였습니다. 제가 상당히 관심 있어 하는 주제이거든요. ‘스카이 캐슬’과 관련한 연재, ‘SBS 스페셜 운인가 능력인가’ 관련한 연재에서도 이미 언급했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필자가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많이 다투셨기에, 그로 인한 상처가 남아있는 제 마음에 기인한 발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봉준호 감독님이 그러한 부분을 확 터트려 주기를 마음 한편에 바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기생충 영화는 배신이었습니다. 카타르시스는 커녕, 마음 한편에 무거움만이 묵직하게 자리를 잡더군요.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너 자신이 기생충이다.’라고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사진_픽셀

 

⌜기생충⌟ 영화에는 기택(송강호 분) 네 식구가 중심이 되어 내용이 전개가 됩니다. 그런데 기택 네 식구는 기생충이라는 영화 제목답게 딱 기생충처럼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공한 CEO인 박사장(이선균 분)네에 어떻게든 얹혀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기생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을 하며, 결국 네 식구 모두 기생하는 데 성공을 합니다. 그런데 변수가 생깁니다. 기택네 가족보다 먼저 기생을 하고 있던 근세 가족의 존재가 나타난 거죠. 이때부터 기택네 가족과 근세 가족이 서로 기생충이 되겠다며 싸우기 시작합니다.

제가 ‘스카이캐슬 드라마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라는 제목의 연재 글에서 언급했던 딱 그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은 이전투구라고 표현을 했었습니다. 개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진흙탕 밖에 먹을 것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진흙탕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고 언급을 했었죠. 기택 네 가족과 근세 가족이 싸우는 모습이 딱 이전투구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딱 우리가 사는 모습입니다.

‘SBS 스페셜 운인가 능력인가’에 나왔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현실의’ 이전투구 모습입니다. 정유라로 대변되는 일하지 않고도 엄청난 부를 누리는 사회 구성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 옆에 있는 사람보다 조금 더 먹으려고 하는 그 모습. 기택 네 가족과 근세 가족의 다툼이 그러한 우리네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상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대놓고 표현이 된 거 같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단(영화에 수직적 구조의 계단이 많이 나오죠) 끝에 올라가야만 볼 수 있는, 그 상류층의 사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상류층의 사람과 나 사이에 있는 자원 배분의 격차가 정말 합리적으로 이루어졌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상류층 사람들은 그러한 관심을 가지지 않기를 원하겠죠.

영화에서도 박사장(이선균 분)은 줄곧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은 선을 넘는 걸 제일 싫어한다고요. 결국 선을 긋고 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기득권의 공고화를 의미합니다. 상류층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가장 안정적인 상황이 될 테죠.

그런데 영화의 메타포로 계속 그 선을 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냄새죠. 그리고 그 냄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박사장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드디어 내 옆 사람과의 이전투구의 장에 그어져 있는 ‘선’을 넘어서 더 큰 프레임을 보기 시작한 것이죠.

이제 뭔가가 바뀌기 시작할까요? 아닙니다. 그것마저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저택에는 다른 상류층이 자리를 잡고, 기택은 지하실에서 또다시 기생충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제가 ‘정신과 의사가 바라본 버닝썬 게이트’ 연재에서 언급했던 내용입니다. 버닝썬 게이트와 연관된 한두 명을 처벌한다고 해서 이 사회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성향귀인을 반복해서 특정인에 대한 비난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다는. 영화 기생충에서도 박사장은 죽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박사장이 아니라, 자원 배분 시스템 자체의 문제이니까요.

버닝썬 게이트도 역시나 초반과 비교해 변화의 기대감이 확 사그라든 것 같습니다. 설사 버닝썬 게이트와 연관된 몇몇이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이 사회가 바뀌지 않습니다. 박사장이 죽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결국 ‘정신과 의사가 바라본 버닝썬 게이트’ 연재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모두가 성향 귀인이 아니라, 상황 귀인을 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내 옆 사람과 이전투구하는 것(기택 네와 근세 네의 싸움)과 내 위에 있는 특정인 하나를 끌어내리는 것(박사장의 죽음)은 두 가지 모두 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결말이 답답하게 ‘마무리 되었듯’이요.

그래도 다행히 첫 단계, 즉 이전투구의 장에서는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게이트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 즉 성향귀인을 통해 특정인에 대한 비난에 그치는 단계는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세 사건이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두 번째 단계도 조금씩 해결이 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은 필요하겠지만요.

 

기생충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문광(근세 아내)이 뇌진탕으로 죽어가며 던진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충숙이 언니(기택 아내)가 원래 참 좋은 언닌데...”라고 말하며 죽음에 이르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전투구의 장 안에 있다 보면 상대방은 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서로 욕하고 헐뜯기 십상이죠. 개 주인들은 그 모습을 재미있게 보면 됩니다. 선을 넘지 않게 울타리를 잘 친 채로요.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옆에 있는 사람은 원래 참 좋은 사람입니다. 싸워야 하는 적이 아니라 연대하고 공생해야 하는 동료인 것이죠. 기생충 영화에서도 진즉에 기택네와 근세네가 연대를 했다면, 영화 결말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네 사는 현실에서도 그러한 연대들이 만들어지고 이 사회의 변화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스스로의 각성이 먼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고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들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손에 땀을 쥐며 ‘근세 가족이 얌전히 죽었으면...’하고 바라고 있었거든요. 결국 기생충은 바로 저였습니다.

비단 영화에 감정이입해서 생긴 문제일까요? 현실에서도 내 옆의 누군가를 밟고 이겨 조그마한 파이를 하나라도 더 얻겠다고 ‘노오력’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영화는 말해줍니다. 기생충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바로 너 자신이라고. 불편하고, 그래서 반성합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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