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임찬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조용한 성격으로 집에서 주로 생활하던 20대 후반 남성 A는 최근 윗집과 자주 다툼이 있곤 합니다.

수개월 전부터 윗집에서 자신을 괴롭히려고 쫓아다니면서 시끄럽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최근에는 자신을 괴롭히려고 카메라를 이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도 하고 전자파를 보내서 잠을 이루지 못하게 괴롭힌다고 합니다.

A는 자주 윗집에 찾아가서 항의를 했지만 A의 주장과 다르게 윗집 사람들은 조용한 편이었고 때로는 출타한 경우도 잦았습니다.

A의 가족들은 A의 행동을 타이르기도 하고 혼을 내보기도 했지만 A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피해망상에 대한 가상의 사례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도 망상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혼자 피해망상을 가지는 것 같다' '뇌 내 망상이 있다' 등은 많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최근 망상과 관련된 뉴스 보도로 망상(delusion)과 관련 질환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사용하는 망상은 일상용어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는데 이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1) 망상의 정신건강의학과적인 정의

망상(Delusion)은 현실에 맞지 않는 잘못된 믿음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가, 나를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 혹시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닌지. 등등’의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가끔 스쳐가는 생각은 스스로 마음을 다잡거나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조절이 가능한데, 쉽게 변화가 가능한 생각은 망상이 아닙니다. 

확고한 믿음으로 쉽게 변화할 수 없고 주변의 설득에도 변화되지 않는 지속적인 생각을 망상(Delusion)이라고 합니다. 확고한 믿음이다 보니 이를 억지로 설득하려는 사람들과 다툼이 있습니다. 감정이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누군가 자신을 괴롭히다는 생각에 무서움에 떨기도 하고, 망상적 생각에 빠져서 주변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습니다. 망상은 기본 전제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비교적 나름대로 논리성을 가지고 잘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체계화된 망상'(systematic delusion)이라고 합니다. 이런 망상은 치료를 통해 교정을 하지 않으면 점점 고착화되고 나중에는 치료하기가 어려워집니다.

A의 경우는 누군가 자신을 괴롭힌다는 전형적인 피해망상(Persecutory delusion)을 호소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고착화되고 체계화(systematic delusion) 양상을 보입니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을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고 오해하는 관계망상(delusion of reference), 감시하고 있다는 감시망상(delusion of reference)을 보이기도 하며 악화되고 있습니다.

 

2) 망상과 정신건강의학과 진단

망상이 있다고 심한 정신질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현병(정신분열병, schizophrenia), 망상장애(delusional disorder)는 망상을 주된 증상으로 합니다. 하지만 망상은 조현병이나 망상장애 외에도 다양한 질환에서 보일 수 있는 증상입니다.

조울증의 조증 삽화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과대망상, 주변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색정망상 등을 보일 수 있습니다. 우울증(depression)에서는 우울증상 외에도 자신이 매우 빈곤하다거나 망했다고 굳게 믿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치매가 간혹 이른 나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데, 치매에서는 주변에 대한 의심, 경계, 자신의 물건을 도둑질당했다는 망상이 흔합니다. 그 외 강박증, 신체염려증에서도 반복되는 생각과 행동이 망상적인 수준에 이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A의 경우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다양한 질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주된 증상인 망상만 본다면 조현병이나 망상장애를 고려할 수 있지만, 다른 증상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 진단을 해야 합니다. 젊은 초발 환자의 경우에는 더욱 세심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이전의 환자 기능상태, 나이, 가족력, 스트레스 요인, 성격적인 요인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3) 망상에 대한 치료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는 크게 약물치료와 정신치료로 구분됩니다. 망상에 대하여는 초기에 약물치료를 시행하고 증상이 잦아든 후 정신치료를 병행합니다. 항정신병약제 (Antipsychotics)가 가장 널리 사용되는데, 항정신병 약제는 선입견과는 달리 안전하고 매우 효과적입니다. 과거에는 약물의 부작용이 많았지만 최근에 개발된 약물은 부작용이 크게 감소했습니다. 

망상을 보이는 환자는 치료 초기에는 스스로의 병식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치료의 유지가 되지 않을 수 있어 보호자가 치료유지에 도움을 주어야만 합니다. 초기부터 망상에 대하여 직접적인 접근은 좋지 않습니다. 약물치료를 통하여 망상이 약화된 이후에 직접적인 언급, 인지적인 접근을 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더불어서 환자의 스트레스 요인, 성격적인 측면, 전체적인 진단 등을 고려하여 추가적인 정신치료와 약물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망상이 심한 경우는 입원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망상이 있다고 입원의 적응증, 특히 강제적인 입원을 시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판단할 때 심한 망상으로 환자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현저히 높고 직계 가족 2인이 동의할 경우에만 보호의무자에 의한 입원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A의 사례에서는 초기 약물치료와 더불어서 증상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치료 유지가 중요한 부분으로 치료 유지에 보호자가 도움을 줘야 합니다. 자타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고된 증상으로는 직접적인 자타해 사고를 보고하지 않아 현재 법률 상에서는 강제적인 입원의 적응증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증상에 대하여 단기적인 경과관찰과 치료를 하면서 위험에 대한 지속 평가가 필요합니다.

 

연말 가슴 아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먼저 치료진의 안전에 대한 관심과 이를 법령을 통하여 개선하는 방안이 꼭 필요합니다.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결코 좋은 진료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치료적으로 환자는 적절한 시기에 필요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인식의 개선은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초기부터 병원에 방문할 수 있게 합니다. 비협조적이거나 병식이 부족한 환자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향에 대한 재고 역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충분히 조절이 가능한 증상이 중증 질환이 되지 않도록 조기에 치료적인 접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임세원 교수님께 다시 한번 추모의 말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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