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30대 후반 여자입니다. 간단하게 성장과정을 말씀드리면 아빠는 알코올 중독, 엄마는 도박으로 부부싸움을 많이 하셨고, 엄마가 많이 맞는 것도 봤고요. 밤에 부부싸움할 때면 자는 척 눈 꼭 감고 있었던 게 기억나네요. 그 후 엄마가 집을 나갔고, 아빠가 알코올 중독으로 돌아가시고 엄마가 저희를 키워주셨고요.

그리고 어렸을 때 성추행을 많이 당했습니다. 동네 할아버지, 삼촌, 동네 오빠...  그때는 ‘내가 나쁜 일을 당했구나. 징그럽다. 싫다.’ 부정적인 느낌이 많이 들었고 어른들한테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누구에게도 말 안 하고 살았어요.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어요. 살면서 내 정신에 영향을 끼쳤나 싶기도 했고 살면서 ‘난 왜 이러지?’ 이런 생각은 가끔 들었지만 깊이 생각 안 했어요.

그리고 남자한테 관심 없었어요.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어울릴 때 한두 번 같이 어울려 봐도 그냥 그랬고요.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이 있어도 몇 번 만나면 시시했어요. 학교를 다닌 20대 중반이 인생에서 남자들과 오래 지내본 시간들이에요. 여자 친구들은 곧잘 어울려 노는데 저는 남자들과 우정 같은 깊은 사람 관계를 맺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냥 인사하고 술자리에도 그냥 겉도는? 느낌으로 밖에...

그러다가 한 오빠가 좋아한다고 표현을 해줘서 진지하게 만나보려고 몇 번 봤는데 단점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한 남자를 만났어요. 사귀다 보면 좋아지고 사랑하겠지 하고요. 헤어졌다가도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고, 아마 그 사람이 많이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해서 저도 잘해보려고 하려다가 헤어지고 그런 거죠.

다른 남자를 만나 봐도 전 아마 똑같은 패턴일 거예요. 사랑할 수가 없어요. 기본적으로 내 마음속에 있는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전 남자를 인간적으로 좋아한 적도 없어요. 괜찮다가도 지내보면 꼭 안 좋은 점이 생겼어요. 어렸을 때는 주로 겉으로 드러나는 거였다면 지금은 행동이나 생각 가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전 남자는 폭력적이고, 유치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중적이고, 징그럽다고 생각하니까요. 살면서 겪어온 경험으로 생각하는 건데 제가 꼬인 거겠지요? 진짜 한 번도 괜찮은,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해 본 사람이 없어요.

이런 제 가치관 바뀔 수 있을까요? 저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이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사진_픽셀

 

답변) 

이 세상에는 ‘보통 가족’이 정말 흔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보통 가족’을 갖는 것이 꿈이기도 합니다. 분명 질문자 분도 이런 꿈을 가지셨을 것 같네요.

부모님이 각각 알코올 중독, 도박중독이셨다면, 경제적 어려움을 포함한 가정 폭력에 쉽게 노출되게 됩니다. 슬프지만, 당연한 일이죠. 또 부모와 어린 자녀 사이의 문제는 주로 집 안에서 일어나지만, 그 흔적들은 집 밖에서도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약간의 관심만 있다면요. 부모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어린 자녀들의 얼굴이나 손, 옷 등이 지저분해지고 냄새가 나기 시작하죠. 이런 흔적들은 자녀들에게 다른 재앙을 안겨줍니다. 야생에서도 어미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새끼 짐승은 포식자의 먹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런 면은 문명화된 인간 세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부모가 보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악한 사람들이 접근하고, 고통을 안겨주죠.

어린아이가 이런 고통들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자기 자신으로 돌리거나, 고통이나 감정 자체를 최대한 느끼려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흔하죠. 이런 방법들은 당장 그 순간을 견딜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손으로 만든 모래벽이 튼튼할 수는 없는 것처럼, 이런 방법들은 어느 순간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런 한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울, 불안, 분노 이런 감정의 형태를 빌려서요. 지금 질문자 분에게는 분노로, 모든 남자가 싫은 것으로 그 한계가 나타나는 듯하네요. 모든 남자가 나쁜 사람은 아닌 데도요.

 

“왜 하필 남자에 대해서일까?”를 생각해 보면 세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다양한 동네 남자들로부터의 성추행. 이런 범죄를 겪고 회복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가해자가 정당하게 처벌받는 거 에요.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을 안 하셨으니, 가해자들이 처벌받지도 않았을 거고, 이때 받은 상처들은 그냥 덮여있을 거예요. 이런 상처들은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저항하지 못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만들어내죠. 

두 번째는 아버지죠. 아버지와 어머니 중 아버지가 더 위협적이셨을 거예요. 육체적인 폭력을 휘둘렀고, 또 결국 이혼을 하고 자녀분들을 떠났으니까요. 앞에서 말한 동네 남자들보다 아버지가 더 위협적인 존재였을 거고, 현재 남자에 대한 분노의 원인도 아버지의 지분이 더 클 것 같아요.

세 번째는 어머니예요. 이혼도 상황에 따라서 모두 달라요. 하지만 질문자 분의 부모님의 상황에서는 어머니가 이혼 전에도, 이혼 후에도 자녀분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비난을 상당히 많이 했을 것 같아요. 물론 어머니에게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겠죠. 하지만 자녀들은 어리기 때문에, 그런 어머니의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요. 아버지가 위협적인 상황에서, 어머니의 미움을 받는 것은 정말 악몽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게 되죠. 아버지가 실제로 위협적인 것에 더해서, 어머니의 비난도 남자 자체를 좋게 볼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될 듯해요.

 

이런 가능성들을 확인하고 치료한다면, 저는 질문자 분이 사랑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여자와는 잘 어울려 논다고 하셨으니까요.

사실 질문자 분의 삶은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도 있었어요. 냉정히 말하면 어머니도 차악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행히 여자에 대한 신뢰는 유지됐기 때문에, 지금 여자와의 관계는 무난한 거예요. 이제 여기에 질문자 분이 원하시는, 남자에 대한 왜곡된 믿음을 수정하면 되는 거죠.

쉽게 말해 100점 만점인 시험에서 50점은 확보하고 공부를 시작하는 셈이에요. 0점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요. 그러니 본인이 믿을 수 있는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서 상담치료를 받으셨으면 좋겠어요. 아마 전문의의 성별이 중요한 문제일 듯해요. 남자 전문의를 믿고 얘기하는 것이 어려우시다면, 여자 전문의 선생님과 상담하는 게 수월할 수도 있을 듯하네요. 사랑하실 수 있어요, 그러니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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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마음숲 정신건강의학과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국립공주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저서 <정신건강의학과는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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