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저는 감정이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이것이 무표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웃는 얼굴 뒤에 감춘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사실 억지로 웃는다는 느낌은 없고, 그냥 사람 앞에서 얼굴 근육이 반사적으로 웃는 꼴을 만드는것 같습니다. 웃는 상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쉽게 좋아하지만, 저는 더 외로워지는 것 같은 모순이 일어납니다.

 

일단 제 배경을 설명드리자면, 저는 자퇴 절차를 밟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자퇴를 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일단 주위 시선에 맞추어 사느라 스스로를 부정하는 느낌이 들었던것에서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과 문과 예체능 가리지 않고 배우는 것이라면 다 좋아했습니다만 제가 특별히 좋아했고 또 비교적 쉽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술 계열이었습니다. 이성을 사귀지 않고도, 진정한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이 쪽으로 종사할 수만 있다면 인생이 뿌듯하겠다 싶은 확신이 몇 년이 지나도 확고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물리 수학 등 이과 계열에서도 1등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과 선생님은 제가 예술 쪽으로 진학하고 싶다니 의아해하셨고, 제 피해의식일지 모르지만 비웃음 당하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수년간 갈등했지만 커가면서 저도 예술 쪽으로 간다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고 오로지 명문 대학만을 그리며 뜻도 없는 이과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울감을 떨쳐낼 수가 없어서 자살 생각도, 자해도 여러 번 해봤습니다.

 

결국 '목표'는 이루었지만 도무지 인생에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저는 학과에서 멍청한 축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열정도 있으면서 똑똑한 아이들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병적으로 타인과 저를 비교하며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규정지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무기력해진 삶 때문에 취미 생활도 다 잃었고, 제 자신이 싫은 것은 물론이고 타인도 싫었습니다.

항우울제를 처방받았으나 그냥 저를 멍하게 하더군요. 제 인생의 모든 것은 다 망가져있었습니다. 가장 심할 때는 음식 냄새에도 구역질이 났고, 주변 사람이 느낄 정도로 살이 갑자기 빠졌습니다. 피부과 진단 후에 탈모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수면 패턴도 엉망이 되었습니다. 자살 계획은 더욱 구체적으로 하는 등 피폐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제가 죽을 것 같아 자퇴를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님과 친구들은 물론이고 부모님도 제가 이렇게나 괴로워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교수님은 자퇴 신청을 듣고 놀라시며 친구도 많고 학교 생활도 즐거워 보였는데 무슨 일이냐는 반응이었고 부모님은 제가 이렇게 힘들어한 줄은 몰랐다며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하셨습니다. 룸메이트가 그나마 알았는데, 제가 밖에서는 보통 사람들 이상으로 계속 웃고 다니기 때문에 너무나도 티가 안 난다는 거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그러긴 합니다. 그런데 억지라는 느낌은 안 든다는 게 더 이상합니다. 사람을 보면 일단 반사적으로 웃습니다. 사람을 만날 상황은 최대한 피해서 친구들도 약속을 거절하는 저에게 지칠 정도였지만, 일단 만나고 나면 밝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인사하고 돌아서 헤어지는 순간 피곤함이 몰려옵니다. 제 룸메이트는 자기는 감정이 바로 드러나는데, 저는 거의 묘기 수준이라며 신기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정이 안 드러나니 서럽도록 외로운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몰랐다는 게, 돌아보니 외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타인 앞에서의 반사적인 미소와 웃음을 멈출 수 있나요?
 

사진_픽셀

 

답변)

짧은 글에서도 글쓴이 분의 힘겨움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자퇴라는 큰 결심을 하기까지, 그 과정에서의 마음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을 읽으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글쓴이 분의 글을 읽으면서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하는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많이 생각이 났습니다. 글쓴이 분이 대인관계에서 소통하는 모습(가면)과 실제 나의 모습과의 괴리가 심해 보였습니다. 나는 그토록 힘든데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 가족들조차도 그것을 잘 모를 정도이니까요.

글쓴이 분도 이 정도는 인식하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자동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으니, 그게 답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에서도 반사적인 미소와 웃음을 멈추고 싶다고 말씀을 하셨던 거 같습니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난 왜 이렇게 반사적인 미소와 웃음이 반복되고 있는 걸까요? 제가 글쓴이 분께서 살아온 인생을 다 알지는 못 하지만, 아마도 어렸을 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가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경험이 많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실패의 경험 뒤에 반사적인 웃음과 미소를 습득하게 되고, 그것이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돌아오자 그러한 습관들이 더 자동화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과정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의 감정을 모두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살게 된다면, 사회 부적응자가 되겠지요. 그렇기에 페르소나는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글쓴이 분은 이런 측면에서 과도한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자퇴를 하게 된 이유조차도 다른 이유보다 ‘주위 시선에 맞추어 사느라 스스로를 부정하는 느낌이 들었던 연유’가 컸던 것만 보아도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요? 내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연습을 해야 할까요? 물론 그런 연습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작정 그렇게 하다가는 또 부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와서 동굴에 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웃는 상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쉽게 좋아하지만, 저는 더 외로워지는 것 같은 모순이 일어납니다.’라고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이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는데도 ‘나’는 외로운 것입니다.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글쓴이 분은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에 대해 스스로 부정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가 있는 그대로 봐주고 인정해주는 연습부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누가 내 편이 되어주지 않더라도 나 스스로가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다면 사람은 외로움의 정도가 훨씬 덜 해질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인 관계를 하다가 반사적인 미소와 웃음이 지어질 때 그때 내 마음을 살펴보는 연습이 정말 중요합니다. 분명 반사적인 미소와 웃음이 지어질 때 내 마음속에는 불편한 마음들이 솟아날 거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웃는 웃음이 아니니까요. 그때 내 마음이 어떤지 살펴보는 것부터가 출발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때 그때 일어나는 내 마음을 지나치지 않고 바라봐주는 것부터가 ‘내가 내 편이 되어주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습관은 생각보다 꽤 강력한 힘을 발합니다. 나도 몰랐던 내 마음과 감정들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바라봤더니 ‘화가 난다.’라고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표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냥 ‘아~ 나 이럴 때 화가 나는구나.’라고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다 보면, 패턴들이 보일 수 있습니다. 화가 나는 상황마다 공통점들이 보일 것이고요. 그런 것들이 보이다 보면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되면 조금씩 내가 내 편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부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실제로 실천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실천을 한다면 그 효과는 생각보다 꽤 크리라 생각합니다. 수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유효한 격언이 ‘너 자신을 알라.’이니까요.

자신을 바라봐주고 찾아주는 연습을 해보시기를 권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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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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