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신용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현재 고등학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까지 인간관계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습니다. 술, 담배는 물론이고 툭하면 폭력 사건으로 난리를 치던 친구들과 지내기보단 혼자인 편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외롭긴 했지만, 그래도 몇 년 보고 말 사이인 사람들로 인해 신세 망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나름 이름 있는 고등학교를 진학해서, 중학교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선발을 통해 학생을 모집하는 학교이다 보니, 그곳에서 만난 학생들은 하나같이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다들 친절했고, 준법정신이 투철했습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친구와 유독 친해지게 됐습니다. 공통의 관심사를 가졌고, 그 친구가 잘 들어주기도 해서였습니다. 그 친구 역시 다른 친구들보다 저와 친하게 지냈기에, 저는 이 관계에 만족하며 지냈습니다. 중학교에서까진 친구 사이에서 겪어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얕은 관계만을 유지하며,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헤어져야 할 사람들'로 친구를 인식하던 제게 깊은 교류는 기쁘면서도 낯선 것이었고, 그 관계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때 마침 친구가 여행을 가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하필이면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제게 수업 필기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친한 만큼 그 친구가 잘 되길 바랐기에, 직접 친구가 취약한 부분의 문제를 만드는 등 성심성의껏 준비했으나,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는 제게 자료를 받아갈 뿐 일체의 교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저는 그 친구가 저를 시험 준비를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고 느껴 기분이 상했고, 친구와 직접 얘기해서 푸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제 기분을 말했더니, 친구는 제가 자신을 제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 일 이후로 그 친구와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했습니다.

 

이맘때쯤 우울증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상태로, 약 한 달간 무기력함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래도 묵묵히 기다려준 또 다른 친구로 인해서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며 그 친구, 그리고 제가 우울감을 느낄 때 함께해줬던 친구와는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딱히 누군가와 친하기보다는 두루두루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가, 1학기 중반쯤에 함께 다니는 무리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초반에는 모두와 동일하게 친하게 지냈는데, 2학기가 시작되면서 또 조금 더 각별히 생각하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계기는 멘토링 활동이었습니다. 제가 멘토고, 그 친구는 멘티였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걸 좋아하다 보니,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또 멘토링 과목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다 보니 그를 주제로 함께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공통 관심사가 있으면 쉽게 마음을 여는 건지, 제가 가르치는 사람한테 쉽게 마음을 여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친구도 제게 각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곧 그 친구는 제가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작은 병은 드러내면서도 큰 병은 숨기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힘든 것에 대해 위로받고는 싶지만, 정말로 힘든 일이라면 괜히 공유해서 상대방까지 마음 불편해지고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시험을 친 이후 자책감에 휩싸였던 적이 있었는데, 다른 친구들이 그냥 넘길 때 그 친구는 세심하게 신경 써줬습니다. 저는 그 점이 감사하기도 하면서, 그 친구를 괜히 걱정하게 한 것은 아닌지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의 도움으로 저는 금방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친구에게는 힘들 때 의지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친구를 부쩍 가깝게 여기기 시작했는데,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혹시 작년과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는 정말 '인싸'였기에, 내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자격지심과 이전에 자책감에 빠져있던 시기 동안 자퇴하고 싶다는 등 부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대한 미안함이 합쳐져 제 자신을 그 친구보다 아래에 두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친구와는 딱 한 번 싸운 적이 있습니다. 큰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고, 그 친구가 멘토링 활동에 성실히 임하지 않음에 제가 일방적으로 한 소리 한 것뿐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바로 사과의 말을 건넸고, 그 이후로 이전과 다름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경험이 1년 전의 일과 겹쳐 보여 이 친구와의 관계도 결국 끝나버릴지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았기에, 심적으로 그 친구에게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스트레스받을 때면 그 친구가 떠오르고, 물질적 공세를 통해서라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종종 생각하지만, 인간관계라는 게 물질적 공세를 한다고 깊어지는 게 아님을 제가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 더 괴롭습니다.

그 친구는 저를 '좋은 친구'로 표현했고, 저 역시 현재로선 그 친구가 저를 떠날 일이 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제 마음은 제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외로웠지만 독립적이었던 중학교 시절의 제가 그립습니다. 1학년 때 겪은 사건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조금 더 편안한 좋아함이 될 수 있길 원합니다. 계속 그 친구가 눈에 밟히고, 그 친구가 맺는 수많은 다른 관계들을 의식하는 생활을 끝내고 싶습니다.

제 외부의 것이 신경을 쓰다 보니 제 내면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져 점점 제 자존감을 갉아먹는 느낌을 받고, 감정 기복도 심해졌습니다. 제가 말한 모든 문제는 한 때는 일상 그 자체였던 외로움이 이제껏 형성하지 못했던 새로운 친구관계로 인해 낯선 것이 되어버려, 다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라고 저 스스로는 인식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저는 그동안 당연히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리게 됨에 따라 과거 상태로 돌아가는 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1학년 때 각별히 친했던 친구와 사이가 틀어진 것이 제 심리에 영향을 주어, 현재 친하게 지내고 있는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증세로 저는 그 친구가 저와의 관계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까 염려하다 보니 제 자신을 그 친구의 아래에 두게 되었고, 그 친구의 다른 인간관계에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는 다른 사람에 대해 원한을 느낀다거나, 그 친구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걸 제지하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그 친구에게 다른 인간관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 친구와 가까운 다른 사람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그 친구와의 관계가, 정확히는 그 관계에 대해 제가 느끼는 바가, 제 자존감을 갉아먹고 있음을 느낍니다.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심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처음인지라, 그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변질되어 심적으로 매달리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존감이 높다 못해 넘치는 수준이지만, 인간관계에 한해선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입니다. 제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면 좋을지, 현재 그 친구와의 관계에 쏠려있는 에너지와 관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여쭙고 싶습니다.

1년 간 고생한 경험이 있기에 이런 마음을 바꾸어 놓는 게 정말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와 공유하고 조언을 들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긴 글 적어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_픽셀

 

답변)

안녕하세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용진입니다. 친구관계, 더 넓게는 대인관계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군요. 고등학생이라고 하셨는데, 그맘때에 깊은 인간관계, 친구관계, 이성관계 등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큰 틀에서의 나 아닌 타인들에 대한 생각과 또 타인 속의 자신에 대한 생각을 정립해 나가게 되죠.

조심스럽지만, 쓰신 글을 읽고 몇 가지 말씀드릴까 합니다. 먼저 글쓴이님께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픈 욕구가 큰 것 같습니다. 대부분 그렇겠죠. 좋은 사람이 되길 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좋은’의 기준은 일반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의 법을 잘 지킨다든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든지’, ‘양심적으로 살아야지’ 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렇게 살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기준 같은 것이죠.

근데 말입니다, 글쓴이님의 좋은 사람이라는 기준은 일반적이거나 자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타인이 보았을 때 좋은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 앞의 사람이 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여겨주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타인에게 자꾸 맞추려고 하게 되고, 인간관계에서 자꾸 작아지고 또 인간관계 자체를 너무 고민하게 되는 모습이 될 수도 있는데, 글쓴이님의 고민도 여기에 닿아있는 것 같아서요.

 

또, 글쓴이님은 자신이 친구들의 영향을 받아 변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지만, 사실 표면적인 것일 뿐 사람의 성격이나 더 핵심적인 무언가를 바꿀만한 영향은 주지 못하죠. 그 정도 되려면 아마도 예수님이나 부처님같이 성인의 반열에 들어야지 타인의 핵심적인 부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글쓴이님은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취약하다. 약하다.’라고 느끼시는 부분이 큰가 봅니다. 그러니까 타인의 영향에 노출되면 자신의 중요한 부분이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특히 중학시절 친구들을 멀리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어서, 타인의 행동과 말을 곱씹으면서 전전긍긍하고 조그만 태도 변화 같은 것에 민감하여, 인간관계에서 과도한 에너지를 쓰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친구가 떠나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때 오랜 기간 무기력감을 느낄 정도라고 쓰신 부분과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는 부분이 아마 그런 증거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또, 글쓴이님은 이렇게 받은 대인관계에서의 상처를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치유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앞서와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 위로하고, 힘이 되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정말 친한 친구나 부부, 가족 관계가 아닌 일반적인 대인관계에서 원하는 만큼 이해와 위로를 받기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니 더 솔직히는, 부부나 가족이라도 나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내가 원하는 만큼의 이해와 위로 또 힘을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럼 인간관계란 게 의미가 있느냐? 너무 차가운 세상 아니냐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정 부분 사실입니다. 진정한 인간관계는 심적으로 독립된 개체들이 서로 필요한 정도의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인관계를 어렵게 생각하고 에너지를 쓰게 되면 피곤해집니다. 우울해지고 집에 오면 지쳐서 아무것도 못할 정도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이것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듭니다. 글쓴이님께서도 쓰셨다시피, 타인 앞에 위축되고 작아지다 보니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더 감추게 되고, 그러면 더 이해받지 못하고, 참다 참다 결론에 이르러 내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면, 중간과정을 모르는 상대방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침범되었다고 느끼거나 이해할 수 없어 자신을 조종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기분이 나빠지며 관계는 어렵게 되는 것이죠. 또 설령 상대방이 받아들인다고 하여도, 항상 저자세고 맞추어주려는 사람에게는 금방 싫증을 느끼거나 부담스러워져서 오래가는 관계가 되기 힘들게 됩니다.

 

누구도 나를 100% 이해하지 못하고 나도 타인을 100% 이해하지 못합니다. 100%라고 썼지만 타인의 감정과 생각을 50% 이상이라도 이해하는 것은 사실 어렵고 많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죠.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과 타인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이라는 것은 100이면 100 다 다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100이라는 신경쓰임과 감정을 가졌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에게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 혹은 소망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70을 줄지 120을 줄지는 상대방의 기준에 달린 것이니까요.

 

친구란 무엇입니까.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편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따듯하고 또 대화할 때는 내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서 가감 없이 드러내도 상관없는 대상이죠. 이 친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저 친구는 왜 그럴까, 왜 나랑 다를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면 그 관계는 진정한 친구관계로 나아가기가 힘듭니다.

친구를 사귀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자신을 드러내면 됩니다. 내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눈치 보지 않고 드러내가며 사람들을 만나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나랑 생각과 감정 코드가 비슷한 사람들은 내 주변에 있게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 정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몇 명 자신의 주위에 생기게 되고, 그들은 당신의 휴식처가 되어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일반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만, 혹시나 조금 걱정되는 부분은 글쓴이님께서 지속적인 자존감의 부족과 부정적인 정서 때문에 어려워하시고 계신 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중학시절은 독립적이라기보다는 피했던 것 같고,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테지만, 전반적으로 글쓴이님을 지배하는 정서가 외로움이나 공허함이고 그 부분을 견디기 힘들어 자꾸 다른 사람(친구)을 탈출구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됩니다. 그런 이유라면 정신건강의학과의 상담을 해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외로움과 공허함이 원인이 되어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면 일반적인 대인관계 상담이 아닌 그 공허함과 외로움에 대한 치료적 접근이 필요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위의 대인관계에서 느끼는 고민들은 어쩌면 그리 신경 쓰이지 않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10대에 하는 타인과 나에 대한 성찰은 긍정적인 면이 훨씬 큽니다. 어렵지만 걸어야 할 통과 의례 같은 것이기도 하죠. 이 과정의 핵심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그럼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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