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전 연재에서 우리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단순한 행동조차도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뇌파의 패턴이 필요하다는 것을 뇌과학 실험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가락을 움직일 때 관절이 어떻고 근육이 어떻게 붙어있어서 어느 근육에다가 어느 정도의 힘을 주는지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움직이는 거지요. 이미 이 정도 상황에는 이 정도의 근육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 프로그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거(진화의 역사)에 의해서요.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무척이나 단순해 보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일단 뼈, 관절, 근육 등 하드웨어적 구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건 진화의 역사로 만들어졌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창조론자들을 제외하고요). 그런데 이 하드웨어 구성만 있어서는 움직임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 하드웨어를 적절하게 움직일 수 있는 소프트웨어도 필요합니다. 그 소프트웨어조차도 진화의 역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내용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최근 ‘제4차 산업혁명’이 화두가 되었죠. 소프트웨어조차도 진화의 역사(과거)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내용은 제4차 산업혁명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 내용입니다. 그 관련성에 대해 오늘 풀어보고자 합니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 중 하나인 AI, 그중에서도 deep learning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불과 수년 전 우리가 그리는 로봇의 움직임과 현재 deep learning 기술로 만들어지고 있는 로봇의 움직임 차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유튜브에서 ‘보스턴 다이나믹스’라고 검색을 해보시면 최근 deep learning 기술로 만들어진 로봇의 움직임을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어색한 로봇의 움직임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변화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입니다. 그 질적인 차이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질적인 차이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 인생에 던져주는 메시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최근 deep learning 기술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먼저, 예전 로봇이 움직임을 만들어내던 방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전 로봇은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장애물과 나 사이에 거리, 각 관절에 써야 되는 힘, 구부려야 하는 각도 등을 here & now에서 계산하였습니다. 그래서 움직임이 그렇게나 어색하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빠른 CPU라도 그 많은 계산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버거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CPU보다 계산이 느림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에 있어 예전 로봇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우리 인간은 here & now에서 모든 것을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 계단의 높이가 몇 cm이고 나랑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으니까 어느 관절을 어떻게 움직이고, 근육에다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고 이런 것을 계산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외부 자극이 들어오면, 과거에 이미 만들어진 운동 프로그램을 꺼내서 쓰는 것에 더 가까운 형태로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here & now에서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예시가 하나 있습니다. 만약, 30계단쯤을 만들어 놓고 마지막 계단만 3cm쯤 더 높게 만들어놓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지막 계단에서 삐끗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계단의 높이가 일정하다고 예측하고 거기에 맞는 운동 프로그램을 내놓지만, 마지막 계단은 우리의 애초 예측과 다르기 때문에 삐끗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전 로봇은 삐끗이라는 게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here & now에서 모든 걸 계산하니까요. 이것이 로봇과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here & now에서 모든 것을 계산하느냐, there & then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탑재하고 있느냐 이 둘의 차이는 사실 어마어마한 차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로봇도 사람의 방식을 흉내 내기 시작했습니다. here & now에서 모든 것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인간처럼 학습(학습이라 함은 실제 시험을 기준으로 ‘과거’입니다)을 통해 많이 쓰이는 방향대로 나름의 추상화된 연결망을 구축해서 미리 탑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에 의해 탑재된 연결망이 있기 때문에 빠르게 자극에 반응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알파고 대국이 끝나고 데미스 하사비스가 했던 말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알파고가 어떻게 대국을 했는지 집에 가서 분석을 해봐야 한다고요. 아니, 프로그램을 짠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프로그램이 어떤 연산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다시 분석을 해봐야 한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다시 분석해서 알 수 있으면 참 다행인데, 요즘 딥러닝 기술은 인간의 계산으로 다시 분석을 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딥러닝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도 드리고 싶지만 글이 너무 복잡해지기에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예전 AI

 here & now에서 모든 것을 계산

 딥러닝 AI

 there & then에서 만들어진 추상화된 연결망을 이미 탑재하고 있음.

 

이 정도로만 정리를 하셔도 제가 전달드리고자 하는 메시지는 전달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큰 패러다임의 전환은 ‘here & now’에서 ‘there & then’으로 변한 지점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전 AI는 here & now에서 모든 것을 계산하도록 만들어졌을까요? 물론 근래에는 기술적인 문제가 걸림돌이 있기는 했지만, AI의 시초에서는 인간에 대한 관점이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관점. 모든 것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계산해서 선택한다는 관점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사실 이 관점은 아직까지도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AI의 변화에서 보듯이, 그 관점은 보기 좋게 틀렸습니다. 인간은 절대 here & now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동물이 아닙니다. 과거에 프로그램된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냥 작동하고 있을 뿐이고, 나중에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가져다 붙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니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굿윌헌팅’의 윌처럼요. 앞선 사례들의 내담자들처럼요. 우리는 그렇게 ‘가짜 이유’를 ‘진짜’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딥러닝 AI의 비유로 이야기를 하면, ‘there & then에서 만들어진 추상화된 연결망’에 우리가 움직이는 진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주체는 과거다’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제가 전달해드리고 싶은 메시지를 거칠게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there & then

 ‘진짜 이유들’이 만들어짐

 here & now

 합리화한 ‘가짜 이유들’을 만들어 냄. 이것을 진짜라고 착각함.

 

AI에서도 ‘here & now’에서 ‘there & then’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듯이, 우리의 삶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은 ‘there & then’에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here & now에서 가짜 이유를 ‘잘’ 만들어내는 동물인지에 대해서도 다음 연재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전에 AI와 관련된 영화 하나로 이번 연재에서 했던 사유에 대해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영화 이야기를 통해 다시 바라본다면, 이번 연재의 사유가 좀 더 쉽게 다가와지시리라 생각합니다.

과학 이야기랑 혼재되어 조금은 어려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어오고 있는 연재의 기저에 깔려 있는 내용들이라 한 번쯤은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더 많은 내용들이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이 연재는 과학 연재가 아니기에,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연재는 다시 영화 이야기입니다. 과학이든 영화든 임상사례든 어떤 이야기도 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수단을 통해 ‘제가 전달드리고 싶은 메시지’로 함께 여행을 떠나보신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재에 관심 가져주시고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본 연재는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강의 내용을 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관련기사

저작권자 © 정신의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