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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or's Mail] 폭신한 쿠션에 집착해요
김정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18.11.08 09:21

[정신의학신문 : 김정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평범한 고3이에요. 한 3년 전까지만 해도 물건에 대한 이상한 집착 같은 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부모님을 별로 안 좋아하게 되고, 부모님께 실망한 부분도 많아지고, 친구들도 많이 안 믿게 되고 하면서 정신이 좀 피폐해지게 된 것 같았어요. 그러던 중에 “친구 생일 선물 뭘 사지?” 하고 둘러보다가, 털로 된 쿠션 같은 걸 제 것도 하나 사게 되었는데, 한 몇 개월은 들고만 다니다가 지금은 걔한테 이름도 붙이고 맨날 쓰다듬고 말 걸고 그럽니다.

주변 친구들은 제가 이런 행동하는 걸 별로 신경 안 쓰고 오히려 같이 장단 맞춰주거나 같이 쓰다듬어 주거나 해서 괜찮은데, 곧 대학 가고 하면, 그때는 들고 다닐 수는 없어서 고민이네요. 없다고 해서 많이 불안한 건 아닌데, 꼭 애완동물 집에 혼자 두고 나온 기분이라고 할까요, 없으면 계속 보고 싶고 쓰다듬고 싶고 그럽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실망하거나 또다시 역시 내 편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얘를 먼저 찾고 말 걸고 그러게 됩니다. 이것도 애정결핍의 한 증상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 증상이지만 도대체 뭔지 모르겠네요. 

사실 이제 얘가 없으면 뭘 보고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이대로 살아도 별 상관은 없지만... 혹시나 병인가 싶어서 물어봅니다. 잘 부탁드려요.
 

사진_픽셀

 

답변)

털로 된 쿠션이 지금 질문자 분에게 중요한 물건이 됐네요. 물건이 반려동물만큼이나 중요해졌기 때문에 이게 병이 아닌가 걱정이신 거고요.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질문자 분처럼, 어떤 물건을 중요하게, 소중하게 여겼던 시절이 있습니다. 태어난 뒤 약 1년 이후부터는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작은 이불이나, 인형을 지금 질문자 분의 쿠션처럼 다루죠. 

잠깐 어릴 때 얘기를 좀 해 볼게요. 우리는 태어난 이후 일 년 동안은 거의 어머니(주 보호자) 품속에서 살게 됩니다. 어머니가 밥을 주고, 씻겨주고, 뒤처리도 해주고, 잠도 자게 해 주니까요. 그래서 어머니가 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굉장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죠. 어머니란 존재가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잠수를 하는데 등에 있는 산소통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두렵겠죠. 그런데 살다 보면 어머니가 사라질 일이 당연히 있죠. 적어도 어머니가 화장실을 갈 때, 아이를 데리고 가지는 않으니까요. 이때 아이는 놀라지만 어머니가 곧 돌아오는 것을 보고, 이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어머니가 없어졌다가도 돌아오는구나.'라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믿음이 생겨도, 오랜 기간 어머니를 못 보는 것은 힘든 일이에요. 아까 잠수할 때 산소통이 사라졌어요. 2분 뒤에 산소통을 머리 위의 배에서 던져준다는 것을 알아도, 불안하겠죠. 그러면 이런 불안을 줄이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보온병만한 산소통을 허리에 차고 들어가면 되죠. 기다리는 동안 작은 산소통으로 호흡을 하면 되니까요.

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어머니가 없는 동안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 어머니를 대신할 물건을 선택하죠. 아무 물건이나 선택하는 것은 아니에요. 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물건을 선택하죠. 어머니의 포근함을 상징하는 인형, 이불, 베개 같은 것이나, 어머니가 주는 포만감을 상징하는 공갈젖꼭지 등을 선택해요. 하지만 더 성장한 이후에는 어머니의 이미지가 마음속에 생겨요. 내 앞에 어머니가 없어도 이제 불안하지 않게 되죠. 마음속에 함께 늘 있으니까요.

이쯤 읽으면 이런 것들을 왜 설명하는지 눈치채셨을 거예요.  성인이 돼서도 자신이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을 상실하게 되면, 자신이 의지하고 싶은 것의 상징물을 선택해서, 그 물건에 의지를 할 수 있어요. 장기적으로 보면 건강한 것은 아니죠.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유용하기는 해요. 누구나 스트레스받으면 이불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잖아요. 단순히 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불의 촉감이 주는 위로를 얻기 위한 것도 있어요.

털로 된 쿠션을 좋아하는 것이 병은 아니에요. 하지만 원래 마음속에 있었던 중요하고 소중한 사람의 이미지들이 깨져버린 것 같아요. 이런 이미지들은 쉽게 다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죠. 또 중요한 사람을 상실한 이후 다른 중요한 사람을 찾아내거나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잃으신 것 같아서 걱정이 돼요. 질문자 분의 표현 중에 정신이 피폐해졌다고 하는 부분이 이런 부분을 표현하신 것 같네요.

작은 산소통으로는 바닷속을 충분히 여행할 수 없어요. 결국에는 큰 산소통이 필요하실 거예요. 지금 큰 산소통을 찾아서 등에 매는 것이 버거우시다면, 잠시는 작은 산소통에 의지해도 좋아요. 하지만, 만약 대학에 가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애인을 사귀고 하는 것 같은 깊은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거나, 유지되지 않는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상담이 도움이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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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kpdco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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