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연재이긴 하지만, 이번 글부터 읽는 분들을 위해 6번째 연재(링크)에서 던졌던 질문을 한 번 더 언급하고 시작해야 할 거 같습니다.

6번째 연재에서 제가 던져드렸던 상황은 이렇습니다. 과학자들이 사람들을 모아서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Random으로 나눈 A 그룹에는 ‘슬픈 영화’를 보여주었고요. 또 다른 B 그룹에는 그냥 ‘평화로운 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영상이 끝나고 ‘컵 하나’를 들고 가서 ‘이 컵을 얼마 주고 사겠냐?’고 물어본 것이 이 실험 내용의 모두입니다.

상황이 어렵지 않지요? 그런데 이 실험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똑같은 컵인데도 불구하고, A 그룹과 B 그룹이 다른 반응을 보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슬픈 영화’를 보고 난 A 그룹의 경우 ‘컵’을 평균 10달러에 사겠다고 반응한 데 비해,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난 B 그룹은 평균 2.5달러에 ‘똑같은’ 컵을 사겠다고 반응하였던 것입니다.
 

사진_픽셀


이 상황에서 제가 던졌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A 그룹은 컵을 평균 10달러에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10달러를 주고 컵을 산 행위는 일어났고, “이 행위의 주체는 과학자인가요, 10달러를 낸 사람인가요(제3의 의견도 가능)?”가 그 질문입니다.

행위의 주체를 과학자로 본 주장에 대해서는 6번째 연재(링크)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연재에서는 행위의 주체를 10달러를 낸 사람으로 본 주장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번 연재가 제가 전달드리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이 됩니다. 6번째 연재에서 살펴보았지만, 처음에 행위의 주체를 과학자(상황 설계자)라고 생각하셨던 분들도 ‘나’와 가까운 이야기가 될 경우, 결국은 행위의 주체를 실제로 행위를 한 사람으로 의견이 바뀌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나’와 거리가 먼 문제(동물 or 타인)에서는 행위의 주체를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여길 여유가 있지만, 내 문제가 되면 행위의 주체를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여기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상당히 불쾌한 기분도 같이 올라오게 됩니다. 제가 6번째 연재에서 이 불쾌한 기분이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번 연재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먼저, ‘10달러를 낸 사람이 행위의 주체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신 분들 분명히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오프라인 강의에서 토론을 진행했을 때 이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대부분 ‘어찌어찌 됐든 간에 실제로 행위를 한 사람이니까 주체라고 생각한다.’이었습니다. 아마 독자 분들도 이렇게 생각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을 해봅시다. ‘10달러를 낸 사람’이 만약 B 그룹에 속해서 평화로운 풍경을 보게 되었다면 똑같이 10달러를 냈을까요? 당연히 아니겠지요. B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면 2.5달러에 가까운 돈을 지불하였을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입니다. 그래서 실험 결과가 상기에 기술한 대로 나온 것일 테니까요. 그러면 어느 그룹에 속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바뀌는 상태이고, 그것을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데도 불구하고 주체로 볼 수 있느냐는 의문에 대해 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거 같습니다. 통제력을 잃어버린 상태를 주체로 볼 수 있을까는 꼭 생각해보아야 할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부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기 실험 상황에서 주체를 ‘과학자(상황 설계자)’로 주장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기서 너무나 치명적인 것이 있습니다. 실험 상황에서 과학자들이 A그룹에 찾아가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줍니다. “당신 그룹은 B 그룹에 비해 4배나 많은 돈을 지불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슬픈 영화를 보여줘서 슬픈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라고요. 이 설명에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 그래서 제가 똑같은 컵인데도 4배나 많은 돈을 내려고 했군요.’라고 인정했을까요?

어느 정도 그림이 나오시죠? 맞습니다. 상당히 불쾌해하고 화를 냈습니다. ‘네가 고작 슬픈 영화를 보여줬다고 내가 4배나 많은 돈을 냈다고? 아니야, 이 컵은 디자인이 예뻐서 10달러야. 이 컵은 10달러의 가치가 있어서 10달러라고. 슬픈 영화 하나 봤다고 내가 바보같이 똑같은 컵에 4배나 많은 돈을 지불할 리가 없어.’ 이런 반응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사진_픽사베이


사실 제가 진행했던 토론 과정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행위의 주체를 과학자라고 주장하셨던 분들’께 제가 마지막에 던진 질문이 있었죠?

“지금 입고 있으신 옷은 본인이 산 게 맞나요? 그렇다면 그 옷을 산 행위의 주체는 누구인가요?”

이 질문에 거의 모든 분들이 불쾌해했습니다. “이 옷은 제가 산 게 맞는데요. 이 옷을 산 주체는 저예요. 이러이러한 이유로 제가 산 거예요.”라고 이야기를 보통 하십니다.

실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지요?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나와 거리가 먼 남 이야기는 쉽게 얘기할 수 있는데, 내 문제가 되어 버리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불쾌한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면, 내 인생은 ‘절대로’ 내 마음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앞에서 이야기한 상황을 잘 정리해봅시다.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하고 나서 그 행위의 주체를 ‘나’라고 여깁니다. 실제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상황(이유)으로 행위의 형태가 결정되었는 데도요. 그리고 그 행위를 합리화할 만한 가짜 이유들(이 컵은 예뻐서, 10달러의 가치가 있어서)을 가져다 붙입니다. 여기에 실제 진짜 이유(슬픈 영화를 보고 나서 공허한 감정을 느껴서)를 알려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합리화한 가짜 이유가 진짜라고 고집하게 됩니다.

제가 ‘진짜 이유’, ‘가짜 이유’라는 단어를 썼는데요. 이 단어가 핵심입니다. ‘가짜 이유를 진짜라고 믿는다!’ 통제라는 것은 간단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알고, 원인을 통제함으로써 결과의 통제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짜 이유’를 ‘진짜’라고 믿게 된다면? 당연히 통제가 되지 않겠지요. 우리 인생이 그래서 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험 상황의 예시로 돌아가 볼까요? ‘이 컵은 예뻐서 10달러야, 이 컵은 10달러의 가치가 있어서 10달러야.’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에게 다음에 또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또 똑같이 반응하겠죠. 이 컵은 10달러의 가치가 있어서 10달러니까요. 그러면 같은 상황이 주어지면 똑같이 반응할 뿐이지 나에게 통제의 여지가 생기지가 않습니다. 그냥 내가 스스로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죠. 결국 이 ‘주체성에 대한 고집’이 역설적이게도 나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게 했던 것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오히려 ‘이 선택은 내가 한 게 아닐 수도 있어. 내가 모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 있어.’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면, 역설적이게도 통제의 여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인데요. ‘통제를 포기해야 비로소 통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한 행동이지만 내 통제가 아닐 수 있어,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 있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나는 슬픈 감정을 느끼면 더 많은 돈을 지불하려고 하는 경향이 자동적으로 있구나.’ 이렇게 인정할 수 있게 되면, 같은 상황이 생겼을 때, ‘어~ 지금 슬픈 감정이 드네. 마음이 편해졌을 때 다시 한번 구매를 생각해볼까?’도 할 수 있고요. ‘7.5 달러면 영화표 값인데 지금 이 공허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그 정도 돈은 더 지불하자.’도 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행동의 결과가 똑같을지 몰라도,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서 또 통제의 여지가 주어진다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 그래서 ‘통제를 포기해야 비로소 통제가 된다.’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컵을 사는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뭐? 컵 하나 사는 거, 옷 하나 사는 거 그게 인생에서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내가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컵 하나, 옷 하나 산다고 그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무슨 의미가 있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동의합니다. 컵 하나 사는 거, 옷 하나 사는 거, 그건 우리 인생에 있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위에서 말한 것들이, 우리가 스스로 주체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생각, 모든 감정, 모든 행동들에 적용이 된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컵이나 옷을 사는 간단한 행위에도 우리가 가짜 이유를 진짜 이유라고 믿으며 살아가는데, 우리의 복잡한 생각, 감정, 행동들에는 얼마나 많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들’이 숨겨져 있을까요?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나가고자 합니다. 우리 삶 곳곳에 그러한 것들이 숨겨져 있었다면, 이것은 심히 심각한 문제일 수밖에 없고, 또한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_픽셀


이어지는 연재 동안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감정, 행동들에 위와 같은 내용들이 적용이 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기회에 꼭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는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주체가 사실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나’가 아니었다? 이 문제는 그냥 지나치기에는 가볍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매트릭스’ 영화에서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과 궤를 같이 하고 있기도 합니다.

- 여러분은 ‘빨간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파란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빨간약’을 선택하셔서 저와 함께 이 문제를 풀어 나가게 되면, 조금씩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6번째 연재에서 제가 던진 질문(행위의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답은 ‘과학자(상황 설계자)’도 아니고, ‘10달러를 낸 사람(행위자)’도 아닌 제3의 답안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그 제3의 답을 알게 되면 이 복잡한 질문을 해결할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답은 다음 연재에서 상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약간의 힌트를 드리자면,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진화 심리학’의 가장 기초적인 이야기와 함께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 본 연재는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강의 내용을 글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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