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온안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Q) 안녕하세요, 저는 남편과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안 되는 신혼 새댁입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2년 연애를 했습니다.

둘 다 각자의 직장을 가지고 있어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습니다.

남편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 업무적으로도 성공을 이루었고, 멋진 외모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 또한 갖추고 있습니다.

제 친구 및 가족들도 남편을 정말 좋아합니다.

 

단, 한 가지... 남편은 흔히 말하는 <경계성 성격 장애>의 특징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솔직히 <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성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특유의 유기 불안, 그리고 일시적 망상이 심합니다.

또한 공허함을 느끼고 극단적 이상화와 평가절하가 교차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저에 대한 신뢰가 곤두박질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저를 굉장히 힘들게 합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서 배우자가 경계성 성격 장애의 특징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선생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남편은 꽤 불안정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유복했지만 부모님도 항상 다투고 힘들었고, 안정적인 날들이 별로 없었지요.

이와 달리 저는 단란한 가정 하에 한 번도 부모님의 이혼 위기를 경험한 적이 없고 정말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습니다만 저는 정신적으로 많이 안정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자부합니다.

저는 타인을 "신뢰"를 기반으로 대하고, 남편 외에도 친구도 많고, 외로움이라는 것을 따로 느끼지 않는 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 책을 통해 어깨너머 지식을 습득하는 정도였습니다만 남편이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본인의 가정환경, 본인의 고민 (공허함, 유기 불안, 남을 쉽게 신뢰하지 못함)을 털어놓자, 곧바로 그가 가지고 있는 이런 특징들이 경계성 성격장애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동일하다는 것을 간파하였습니다.

 

남편이 출장을 한 번 가면 몇 주가 걸리고, 또 자주 가는 편입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저는 똑같이 회사 다니고,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금요일이면 맘 맞는 친구나 동료들끼리 맥주 한 잔 기울이고, 발 넓고 사람 좋아하는 저의 이런 부분이 남편의 이러한 성향을 건드리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제 점심시간에 맞춰서 연락을 했는데 제가 바로 답을 안 할 경우, 제가 동료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답장을 보내는 건 실례이기 때문에 핸드폰을 체크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대체 믿지를 못합니다. 제가 변했다고 비난하고요.

제가 친구들이랑 약속을 잡아서 나가면 꼭 단체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남편이 제 친구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다고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하여 그 친구와는 연락을 끊은 적도 있습니다.

제가 남편이 어떤 의도나 심리를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질문과 망상을 펼치는지 잘 알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자가 검열"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말, 저에게는 이유가 있어서 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이 남편에게는 어떤 망상과 불신의 씨앗을 낳는지를 들어보면 정말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얼마 전에는 '신뢰' 문제로 크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나는 당신을 신뢰하지만, 당신이 예전과 '다르다'고 여겨질 때 나는 당신을 신뢰할 수가 없다"라고 합니다.

저는 "어떻게 신뢰가 조건부일 수가 있느냐, 그건 결국 당신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라고 받아쳤습니다.

순간 남편이 상담과 자기 돌아봄을 통해 나아지기를 누구보다도 바라고 지원해 왔던 저도 한계에 부딪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순간 저도 말을 돌려서 하지 못하고, "우리 둘 사이의 신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남은 내 인생을 당신과 함께 보내기가 힘들 것 같다"라는 폭탄선언을 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의지가 큰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너무나도 미안했으나, 저 또한 사람이기에 제가 한계에 부딪혀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에게는 커플 사이의 '신뢰' 문제가 너무도 중요합니다만 저는 제가 사랑하는 이 사람을 그냥 이런 식으로 내치고 싶지 않습니다.

애착을 느끼는 상대가 '저'임을 감안할 때, 제가 어떤 행동과 말을 남편을 하여 남편이 불안하지 않도록, 또 남편이 유기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

제가 단지 다른 사람이랑 어울리지 않고, 이야기를 섞지 않는다면 해결될 일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해야 할 말과 행동/하지 말아야 할 말과 행동을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선생님의 진단 및 조언을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A) 안녕하세요. 길고 자세하게 보내주신 질문자님의 사연 꼼꼼하고 신중하게 읽어 보았습니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의 갈등으로 고민이 정말 많으신 것 같습니다.

걱정되게도 질문자님도 남편분도 점점 지쳐가고 계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고민뿐 아니라 슬픔과 불안, 걱정과 답답함, 분노가 모두 함께 느껴지는 것 같네요.

그동안 질문자님께서 겪어오신 힘겨운 시간들과 고민이 충분히 미루어 짐작이 되는 것 같습니다.

 

우선 저는 무엇보다도, 질문자님께서 생각하시고 계시는 '경계성 성격'이라는 남편의 진단명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질문자님의 남편분을 만나 뵌 적이 없습니다. 질문자님 역시 직접 만나 뵌 적이 없지요.

여기에 적어주신 글 내용 만으로 누군가를 진단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질문자님께서는 분명 남편을 '경계성 성격'이라고 진단하고 계신 것 같다는 부분입니다.

 

'정신과적 진단'은 정신건강의학과에 몸을 담고 치료하는 의료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내담자를 상담하는 상담가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어떤 일정한 틀과 패턴으로 문제점을 나누고,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특성과 예후에 맞춰, 치료나 면담에서의 적절한 태도 등을 결정하는 데에 무척 도움이 되는 과정입니다.

진단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를 선별적으로 제공해주겠다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지만 가장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실제 임상 상담의 환자 한 명, 한 명 앞에서는 진단명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환자를 아예 진단하지 말라는 정신분석가 선생님들도 계십니다.

물론 비약적인 주장이긴 합니다만,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그러한 의견에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단한다는 행위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그 진단명의 틀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행동과 성격, 정신적인 역동은 결코 어떤 몇 가지의 패턴으로 획일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진단을 내리고 나면 면담에서의 드러나는 그 사람의 모든 것들이 그 진단명을 통해 걸러져서 나의 눈과 귀에 들어오게 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공포증이라고 상대방을 진단하고 난 뒤에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 모든 불안, 모든 걱정거리들, 심지어는 그 사람 스스로를 지탱해주는 강점들까지도 사회공포증에서 야기되는 '다른 사람의 부정적 평가에 대한 불안'으로 해석하게 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지요.

면담시간에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내담자가 아니라 그러한 진단명을 가진 환자 하나가 되어 버릴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진_픽사베이

 

어쩌면 질문자님께서 남편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그러한 부분들이 조금씩은 포함되지 않았었나 하는 섣부른 우려가 듭니다.

심지어 질문자님은 남편의 상담가, 남편의 치료자가 아니라 남편의 부인인데 말이지요.

물론 그것이 남편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과 통제 불능 같은 모습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한 질문자님의 힘겨운 노력이었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서, 남편이 대체 왜 저렇게 까지 힘들어하는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심리학' 그리고 '경계성 인격장애'에 대한 공부였을지 모릅니다.

그 진단명이라는 안경을 통해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 질문자님께서 사랑하는 남편을 그래도 따뜻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남편의 그러한 불안정함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아줄 수 없었기 때문에 선택했던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니라면, 그저 내 남편이라는 사람이 나를 이토록이나 아프게 하고, 이토록이나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끌어 안아 보듬을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엔 너무나 버거운 남편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남편분 또한 질문자님의 그런 버거움과 신음을 무의식적으로라도 눈치채고 계셨을 수 있겠지요.

그것이 남편분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고요.

 

저는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분들 뿐만 아니라 환자분들의 보호자분들과도 면담을 자주 하지만 그때마다 듣는 질문은 가족을 치료할 수 있는 테크닉과 스킬을 좀 전수해달라는 것입니다.

물론 면담에는 테크닉과 스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보호자분들의 역할이 아닙니다. 가장 힘들고 아파하고 있는 환자분, 그 환자분의 사랑하는 가족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희들의 역할이지요. 다만, 가족분들께 부탁드리는 것은, 그리고 정말로 가족분들만이 해주실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랑하는 가족'이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에 대한 치료법, 그러한 환자들과 면담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정신과 교과서를 찾아보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면담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등과 같은 것들 말이지요.

하지만 제 섣부른 판단에 지금 질문자님에게 정녕 필요한 것이 그런 것들이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환자분들, 마음이 아픈 분들, 불안정한 분들은 어떻게든 그 불안과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칩니다.

안타깝게도 그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성숙하게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결국 그 발버둥은 주변 사람들을 대신 아프게 합니다. 대신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킬 따름이지요.

오히려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주변을 마구 찌르고 괴롭히는 방법으로 밖에 힘들어할 줄 모르는 자신들의 모습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마구 주변을 찔러댈 때에 '왜 난데없이 날 찌르냐'라고 분노하기보다는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불안한지'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말이지요.

 

어렵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체적인 해결책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길을 걷더라도 불안정한 사람과 함께 사랑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고 명쾌한 길일 수만은 없습니다.

질문자님께서도 남편분께서도 얼마간은 더, 어쩌면 지금보다 더 힘드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어떻게 그 길을 걷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넘어지고 함께 아파하더라도 어디를 향해서 걷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겠지요.

질문자님께서도 지금 내 옆의 남편을, 상처가 많아 상처받고 싶지 않아하는 남편을 이해해주실 수 있는 여유를 되찾으실 수 있기를 응원하도록 하겠습니다.

 

 

김총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온안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석사, 전공의
한양대학교병원 외래교수
저서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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