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러분, 밥은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행위일까요? 우리는 흔히 ‘한 끼 챙겨 먹었다’는 말로 식사를 표현하곤 합니다. 더 나아가 어떨 때는 “끼니를 때웠다”거나 “배를 채웠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밥은 우리의 신체 건강만 아니라 마음 건강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한 끼를 누구와, 어떤 분위기에서 먹었느냐에 따라 마음의 영양 상태도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식사를 누구와 함께 하느냐’는 점이 점점 더 중요해집니다. 혼자 식사하는 노인은 함께 식사하는 노인에 비해 우울 위험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노인들의 혼밥과 우울과의 연관 관계는 우리 사회의 노인들이 겪고 있는 고립과 심리적 빈곤을 보여주는 단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저소득층 노인의 경우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식비를 아끼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인스턴트 음식이나 저렴한 음식을 찾게 되고, 누군가와 함께 식사할 때 식사비용이 부담스러워지면서 혼자 밥을 먹는 경우도 많아집니다. 이 같은 사실은 노인 혼밥의 이면에 경제적, 심리적, 관계적 어려움과 고립, 그로 인한 심리적, 신체적 악영향이라는 다층적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삶의 변화와 도전들, 극복해야 하는 문제들 속에서 경제적, 심리적, 관계적 측면에서의 어려움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혼밥인 것이죠.
나이가 들면 신체의 기능만 저하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할 상실, 가까운 사람들과의 이별, 경제적 제약, 일상의 단조로움은 자연스럽게 노인의 정서적 기반을 흔들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울감’은 은근히 스며들어 오랜 시간 마음을 짓누르는 대표적인 정신건강 이슈입니다. 연구에 따라 노인인구 중 우울증 유병률에는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65세 이상 노인의 약 10명 중 1명 이상이 임상적으로 우울 증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 노인, 저소득층, 독거노인, 만성질환을 앓는 분들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노인 우울증은 젊은 세대의 우울증과는 양상이 다소 다르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슬프다거나 눈물이 난다는 표현보다는, 입맛이 없거나, 잠이 잘 안 오거나,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거나, ‘사는 게 무의미하다’는 식의 신체적 고통 호소, 무기력한 표현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 들면 다 그렇지’, ‘살아봐야 뭘 하나’라는 말들이 그 자체로 우울의 언어일 수도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혼밥’은 왜 문제일까요? 식사라는 행위는 단순한 영양 섭취를 넘어 사회적 교류와 정서적 안정의 시간입니다. 함께 밥을 먹으며 나누는 짧은 안부 인사, 밥맛에 대한 공감, 누군가의 표정을 마주 보는 일은 생각보다 우리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혼자 밥을 먹는다는 건, 단순히 동반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관계가 없다’는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이 감정이 반복되면 자아존중감은 떨어지고, 외로움은 점점 깊어지며 우울증의 위험은 높아집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관계의 회복과 작은 일상의 연결은 노인의 우울을 예방하고 회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 복지관, 경로당, 마을식당 등에서 단순히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공동 식사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노인들의 식사와 정서적 소통을 함께 제공하기 위한 정책을 확대 시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독거노인분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돌봄을 제공하는 공공이나 민간단체의 지원 서비스 등은 노인들의 고립감과 외로움 해소에 큰 도움이 됩니다. 식사를 함께 나누고, 얼굴을 마주보는 시간이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마음을 나누는 정기적인 만남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웃이나 자녀들이 주기적으로 식사를 함께 하거나, 함께 마트를 가고 간단한 반찬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우울 예방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정책적, 사회적 노력과 함께 어르신들 역시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는 노력이 있습니다. 혼밥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식사 시간을 정해두고 조명을 켜고, 라디오나 음악을 틀어놓으며 ‘혼자지만 허투루 먹지 않는’ 식사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식을 직접 준비하는 과정을 즐기거나, 식사 후 산책이나 전화 통화 같은 ‘마무리 루틴’을 만들어두는 것도 정서적 고립을 줄이는 데 효과적입니다.
더불어, 노인 우울은 치료가 필요한 의학적 질환이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우울감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때는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센터,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을 통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약물치료나 단기 상담, 집단 프로그램 등은 회복의 전환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식사는 마음의 연결입니다. 함께 먹는 밥 한 끼가 외로움의 강도를 줄이고, 정서적 회복을 돕습니다. 우리 주변의 어르신들이 식탁에서 혼자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마음속에서도 혼자가 되지 않도록, 사회 전체가 작은 연결을 만들어갈 때입니다. 마음의 허기까지 살펴주는 사회, 그리고 스스로를 존중하며 식탁을 차리는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함께 준비해야 할 ‘건강한 식사법’입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