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최준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진_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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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 보면 답답하고 화나는 일이 참 많습니다. 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도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일방적으로 참아야 하는 상황도 생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울분과 함께 분노, 무기력감, 우울감 등을 느낍니다. 이런 마음을 표현할 때 한국인의 고유한 정서라고 하는 ‘한(恨)’과 함께 ‘화병’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화병은 우리나라의 문화적 특수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화병은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는 억울함과 분함, 이런 감정이 통제되지 못하고 극한 흥분과 그로 인한 몸과 마음의 기운이 쇠하는 것을 말합니다. 화병이 있을 때는 마음속에서 질투나 노여움이 생기면서 울화가 치밀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답답함을 느낍니다. 대표적인 증상으로는 우울, 불안, 답답함, 신경질, 걱정, 귀찮음, 예민함, 수치심,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분노 같은 심리적 증상과 머리와 가슴 통증, 위장장애, 신체화, 두통, 불면증, 메스꺼움, 열감, 눈물, 한숨, 식은땀, 메스꺼움, 목이나 입 마름 등의 신체적 증상이 있습니다.

 화병은 원래 민간에서 통용되는 질병의 개념이었으나 이시형(1977)이 화병을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처음 연구한 이후로 화병의 개념, 유병률, 원인, 증상, 치료법 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화병에 관한 연구는 정신의학만 아니라 간호학, 심리학, 한의학, 사회복지학, 문화인류학 등에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화병의 유병률은 연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4.2%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병은 특히 중년기 이후 여성, 그중에서도 주부와 기혼자, 교육 수준이 낮거나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편입니다. 그러나 화병은 중년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며, 남성이나 아동 청소년 등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화병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남성도 증가하고 있으며, 화병이 나타나는 연령대도 낮아지는 추세를 보입니다. 이에 남성들에게서 나타나는 화병의 특징이나 다양한 연령과 성별에서의 화병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화병이 문화특수적인 질병인 만큼 발병에는 개인적 측면만 아니라 환경적, 사회문화 또는 구조적인 부분이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느끼는 부당함이나 역할기대, 그로 인한 부담감, 경쟁적인 사회구조와 직장불안정성, 과도한 교육열과 입시경쟁, 경기 불황과 취업난으로 인한 압박감은 화병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기대치가 높고 개인이 져야 할 부담은 큰 반면 이를 적절하게 표현하거나 해소할 기회는 많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답답함을 마음속에 쌓아놓게 되고, 그것이 나중에는 화병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표출하기보다는 음주나 흡연, 게임 같은 일시적인 방편으로 해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화병은 스트레스와 연관이 깊은 우울증, 불안장애와 함께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그만큼 화병이 생기는 데 스트레스가 큰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정서적인 스트레스가 화병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내적 고민이나 갈등을 표현하지 못하면서 울분과 억울함이 커지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가족 불화, 경제적 어려움, 좌절 경험, 고통스러운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 역시 화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독 화병이 오래전부터 하나의 질병으로 자리 잡은 데는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을 꼽을 수 있습니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라는 속담에서도 이러한 인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과격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다양한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관계를 망치기도 하고, 자신이나 타인에게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조직 생활에서도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편한 마음이 있어도 적당히 넘어가거나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하다. 괜한 분란 일으켜서 좋을 게 없다.’라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무작정 억누르는 것이 습관이 되면 마음에 응어리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응어리가 쌓여서 화병이 되는 것이죠. 따라서 내 생각과 감정을 외면하고 억압하기보다는 정확하게 인지하고 적절하게 다루고 표현하는 법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화병의 이면에는 ‘나는 억울한 피해자다’ 혹은 ‘다른 사람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내 생각이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는데요. 이런 생각은 물론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억울하게 당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내 의견이나 감정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부정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변화하는 것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이 계속 유지된 상태에서 부정적 생각과 감정만 강화될 뿐이겠지요. 대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신에게 질문해 보고 ‘그렇다면 이런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보세요.

 답답한 사회구조나 가정환경, 직장생활 등에서 억울함과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스스로 들여다보고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억울함과 분노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건강하게 표현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처법을 찾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신세 한탄이나 한풀이가 아닌, 내가 느끼는 감정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어떤 변화를 원하는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리된 생각과 감정을 상대방에게 공격적이거나 비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전달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와 함께 사회적으로는 다양한 연령과 성별, 계층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이나 침묵, 인내를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생각과 감정, 개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확산되어야겠습니다. 억울하거나 부당한 상황에서도 참아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화병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삼성양재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최준배 원장

 

<참고문헌>

구세준, 현명호 and 배성만. (2011). 스트레스, 대처 전략 및 용서가 화병 증상에 미치는 영향. 한국심리학회지: 건강, 16(4), 691-707.  김민정 and 현명호. (2010). 스트레스, 사회적 지지 및 자아존중감과 남성 화병 증상의 관계. 한국심리학회지: 건강, 15(1), 19-33.

최준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삼성양재숲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대학원 졸업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임의
전)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임상부교수
전)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 마음건강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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