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ㅣ 최준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사연)
안녕하세요. 30대 주부입니다. 오랫동안 반복되는 대인관계의 어려움이 있어서 사연을 남깁니다. 저는 그동안 만났던 지인이나 직장동료와의 관계가 오래 이어진 적이 없습니다. 만나는 당시에는 친하게 지내고 잘 하지만 이사하게 되거나 회사를 옮기면 제가 먼저 연락을 끊거나 만나려 하지 않아요. 이사도 자주 해서 새롭게 누군가와 친해져도 결국 남이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4년 전 결혼을 하고 돌아보니 그동안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네요. 그동안 남편과도 몇 번이고 이혼하려고 했는데 고비를 잘 넘겨서 더 이상 이혼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렇게 누구든 헤어짐을 쉽게 생각하고 시간이 지나서는 그런 생각과 행동한 것을 많이 후회해요. 왜 굳이 차단까지 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냉정하고 이중적일까 자책도 되고 이해도 안 돼요.
사람을 사귈 때 뭔가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느끼거나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쉽게 마음의 문을 닫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당시에 그런 생각이 들어도 거의 티 내지 않거나 웬만하면 상대방에게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그러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거나 습관처럼 “피곤하다”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상대와 물리적으로 헤어지면 더 이상 관계없는 사이라고 단정지었어요. 나 자신만 봐도 부족한 것 투성이인데 왜 사람을 사귈 때 이것저것 따지고 솔직해지지 못하는지 답답하고 스스로 화가 납니다.
어린 시절 배경을 말씀드리자면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할아버지, 외삼촌, 숙모랑 같이 산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와 삼촌은 알코올 중독에 숙모, 할머니를 자주 때리고 집 물건을 부쉈어요. 그 후 두 분 다 이혼하고 저는 할머니랑 둘이 살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심한 우울증에 정신과를 다니셨고 매일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초등학교 때는 왕따를 자주 당했고 중학교 때 자퇴했어요. 제가 성인이 되어서는 외국에서 재혼한 엄마와 잠깐 같이 살았는데 매일 싸우다시피 해서 1년도 안 되어 나와 살다가 현재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꿈도 없이 지내다가 최근에 언젠가 보육교사가 되어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고아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어요. 그러려면 지금보다는 대인관계가 나아져서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답변)
안녕하세요. 인간관계에서 반복되는 단절과 친밀감을 지속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으로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사람들과 쉽게 인연을 끊는듯한 본인의 모습에 답답하고 이해가 안 되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아서 의아하실 텐데요. 나름대로 그 이유도 많이 생각하며 고민하신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연을 보며 어린 시절 안전한 울타리, 버팀목이 필요했을 어린 사연자님께 충분히 기대고 의지할 만한 어른이 없으셨겠다 싶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애정과 안정감을 통한 관계에서의 친밀감, 신뢰를 형성해야 할 시기에 그런 경험을 충분히 하기가 어려우셨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부모님의 이혼, 할머니와 숙모에 대한 할아버지와 외삼촌의 폭력을 경험하면서 타인에 대한 긍정적 기대나 신뢰보다는 불안과 혼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셨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 후 나를 떠나고, 함께 살게 된 조부모님과 외삼촌 부부는 폭력과 갈등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어린 사연자님의 마음에 인간관계는 믿을 수 없고 의미 없는 것,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지 않았을는지요.
이와 함께 학창 시절 왕따 경험이 여러 번 반복되면서 누군가를 신뢰하거나 마음을 주기가 더 어려우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타인과의 관계가 행복과 즐거움, 만족감, 안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위협적이고 불안정한 것,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계속 강화된 것이죠.
‘어차피 언젠가 헤어질 사람들, 마음을 주어봤자 보상받을 수 없는 관계’라는 인식이 가족분들과의 경험에서 강해지면서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선과 믿음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연 초반에 사람을 사귈 때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느끼거나 사연자님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 쉽게 마음의 문을 닫는다고 하셨는데요. 성인이 되어서 타인과 맺는 관계 속에서 어린 시절 가족관계나 교우관계에서 느꼈던 부정적 영향이 다시 떠오르거나, 그때 느꼈던 존중 받지 못하는 느낌이 촉발되면 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크게 들고, 관계를 끊고자 하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기본적으로 타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불신이나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도 더 크게 반응하거나,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다른 메시지를 읽기도 하고, 굳이 노력해서 관계를 지속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만날 당시에는 잘 지내고 그런 생각이 들어도 잘 티 내지 않거나 상대방에게 많이 맞추려고 노력하신다고 하셨는데요. 불편한 점이 있어도 티 내지 않고 맞추려고 하면서 관계에서 본인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거나 상대방과 소통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욕구나 필요를 충분히 이야기하기가 어렵고,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맞추느라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게 됩니다. 집에 돌아온 후 녹초가 되거나 피곤하다는 느낌을 받으셨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관계에서 서로 주고받으며 힘이 되기보다는 소진되고, 상황상 만나야 할 때는 겉으로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이상 만나야 할 명분이 없어졌을 때는 굳이 그 인연을 이어가려 하지 않는 것이죠. 만약 그 관계 안에서 정서적으로 채워지는 느낌,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꼈다면 굳이 연락 해야겠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텐데 말이죠.
이렇게 관계에서 타인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인식과 불편감이나 내 솔직한 마음을 나누는 소통 능력의 부족이 대인관계 느끼시는 어려움의 주된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우선 관계에서 타인의 욕구나 필요만큼이나 나의 욕구와 필요도 소중하게 여기고, 내 마음을 타인에게 솔직하게 표현해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솔직하게 표현하는는 것이 무례하거나 일방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리거나 비난하지 않으면서,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 혹은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이 들었다’라고 ‘나’를 주어로 해서 대화해 보시면 어떨까요? 이를 ‘I message’라고 합니다. 이와 함께 상대방 의견에 동의하지 않거나 불편한 점이 있다면,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야기한다고 밝히시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상대방 입장에서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사연자님이 갑자기 연락을 끊거나 인연을 이어가지 않는 것보다는 불편한 점이 있으면 솔직하게 나누고, 대화로 풀어가는 것이 더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관계 안에서 긍정적 경험을 쌓아가고,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느껴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타인은 믿을 만하지 못하다’, ‘모든 관계는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다’, ‘관계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인식이 변화되는 경험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긍정적인 점은 사연자님이 관계에서 반복되는 패턴에 대해 스스로 인지하고 계시고, 그 원인에 관해서도 깊이 고민하셨으며, 변화를 원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또, 남편분과의 관계에서도 고비가 있었지만 잘 넘기셨고 이제는 더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려가고자 하고 계신데요. 남편분과의 관계에서 여러 고비를 잘 넘기신 것은 그동안 익숙했던 ‘단절하는 인간관계’를 깨뜨린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남편분과의 관계도 포기하고 단절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사연자님이 가지신 자원을 발견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남편분과의 갈등 해결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생각이나 태도, 행동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때 도움 된 생각이나 행동, 반대로 관계를 나빠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정리해 보시면서 그런 면이 다른 인간관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탐색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관계를 지속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각이나 행동에 관해 더 깊이 파악하고, 조금씩 실천에 옮겨보시면 어떨까요?
관계에서 솔직하게 소통하기 어려운 면이 사연자님의 내면에 있을지 모를 불안감과도 연결되어 있을 수 있는데요. 어린 시절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사연자님의 솔직한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할 기회가 많이 없으셨을 텐데요. 내 감정과 필요에 귀 기울이지 않는 부모님과 가족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왕따시키는 학우들로 인해 내 속마음을 감추고 묻어두는 데 더 익숙해지셨던 것 아닐까요. 그러면서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에 더 초점을 두고, 내가 참고 넘어가면 된다고 여기며 그런 행동 패턴이 몸에 익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관계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나를 속이는 느낌과 함께, 내 마음의 항아리 속에 있는 물을 계속 퍼주기만 하고 나는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드니까요. 내 마음을 계속 주기만 하면서 내 항아리는 말라버리고, 어느 순간 물이 바닥나면 그 관계를 놓아버리는 패턴이 반복되는 것이죠. 그럴 때 이사나 이직 같은 물리적 환경의 변화는 인연을 끝내기 위한 좋은 이유가 되는 것이고요.
이제는 사연자님의 마음과 욕구에도 조금 더 귀 기울이시면서, 관계에서의 균형을 찾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방적으로 맞춰주기만 하는 것이 아닌, 관계에서 오는 상호작용과 서로가 채워지고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삼성양재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ㅣ 최준배 원장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전임의
전) 강북삼성병원 기업정신건강연구소 임상부교수
전)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 마음건강클리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