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늘 여러분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지루하고 더디게 흘러간다고 느끼실 수도, 또 반대로 너무 바빠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어린 시절을 한번 떠올려 볼까요? 학교에 다녀와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여기저기 다녔던 시절들, 잠자리도 잡고 개울가에서 송사리떼를 좇으며 놀았던 기억, 어린이날 전날 밤 부모님이 무슨 선물을 사주실까 기대하며 잠 못 이루던 순간 등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오르실 텐데요.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분명 그대로일 텐데 이상하게 우리가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는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된 이후가 확연히 다릅니다.
흔히들 10년씩 더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에 가속이 붙는다고들 합니다. 10대에는 1의 속도로 시간이 흘렀다면 20대에는 2배, 30대에는 3배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말이죠. “세월이 쏜살같다”라는 표현도 아마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번 시위를 당겨 날아가기 시작한 화살은 속도도 빠르거니와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 흘러가는 시간이 바로 그렇다는 뜻이겠지요.
어린 시절에는 천천히 흘렀던 시간이 어른이 된 지금은 왜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것일까요? 반대로, 사고를 당하거나 위급한 순간에는 삶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면서 슬로우 모션을 건 것처럼 시간이 매우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목숨의 위협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순간, 어딘가에 발이 걸려 중심이 쏠리면서 넘어지는 순간, 시간이 일시적으로 느려지는 것 같은 경험을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셨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신경의학 분야를 비롯한 의료계와 과학계에서도 우리 뇌에서의 시간 지각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뇌과학자이자 <더 브레인>, <인코그니토>, <창조하는 뇌>를 저술한 작가인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은 시간 지각과 관련된 다양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실험으로는 번지점프 상황에서의 시간 지각 측정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실험에서 그는 실험참가자들에게 번지점프를 하는 동안 전자스크린에 나타난 숫자들을 읽어 보도록 주문했습니다. 숫자들이 바뀌는 속도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속도보다 약간 빠른 편이었습니다.
실험에 앞서 그는 위험 상황에서는 평상시보다 더 빠르게 정보를 인식 및 처리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는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번지점프라는 위기 상황 속에서 정보 인식이 빨라지므로 실험참가자들은 전자스크린의 숫자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실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실제 낙하 시간보다 35%가량 더 오랜 시간을 낙하했다고 느꼈지만, 여전히 전자스크린의 숫자는 읽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이글먼의 가설은 기각되었지만, 이 같은 결과는 실제로 흘러가는 시간과 우리가 느끼는 시간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시간에 대한 기억에서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각, 촉각을 비롯한 오감을 활용해 다양한 자극과 경험을 받아들이고, 자극과 경험, 그때 드는 감정이나 생각은 다시 시간 위에 배열됩니다. 그 과정에서 위기 상황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 중요한 사건, 새로운 경험이나 큰 자극이 주어졌을 때는 뇌가 각성되면서 자극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각, 감정에 대한 처리가 함께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는 순간에 ‘지금 넘어지면 얼마나 다칠까? 어떻게 넘어지는 게 나을까?’, ‘자전거 타지 말고 그냥 걸어올걸’하는 것 같은 여러 가지 생각이 함께 드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런 감정이나 생각, 넘어지는 상황 등 여러 가지 정보들을 마치 돋보기를 들고 보는 것처럼 면밀하게 확대해서 살펴보면서 그 순간이 상대적으로 크고 중요한, 긴 시간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또, 다른 예로 신입사원 시절과 입사 3년 차 시기를 비교해볼까요? 처음 가보는 낯선 출근길, 처음 보는 사람들, 익숙하지 않은 사무실과 업무 등 모든 것이 다 새롭고 신기합니다. 주어진 모든 자극에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게 되죠. 그래서 이 시기를 돌이켜보면 시간이 느리게 갔던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반대로 3년 차 정도 되었을 때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빨리 간 것 같습니다. 주변 환경과 자극에 익숙해지면서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게 되고, 여유가 생기죠. 그러면서 마치 카메라가 뒤로 빠지고 풀샷으로 전경을 찍는 것처럼 그 시기가 순식간에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뇌의 시간 지각은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분비와 관련 있는데, 도파민은 보상, 쾌락과 함께 우리 몸 안의 내부 시계 조절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도파민 분비가 활성화되면 중뇌에 위치한 선조체(striatum)라는 신경회로가 빠르게 진동하고 도파민 분비가 감소하면 진동이 느려집니다.
그 결과 도파민이 많이 분비될 때는 시간에 대한 내부 기준이 빠르게 돌아가 상대적으로 외부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고, 반대로 도파민 분비가 적을 때는 선조체 회로가 느리게 돌아가 같은 시간도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는 노년기의 도파민 감소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은 느낌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사소한 것들도 모두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지며 기억에 크게 남는 반면 어른이 된 후에는 대부분의 자극이 이미 알고 있는 것, 경험해 본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린이들에 비해 크게 기뻐하거나 웃는 일이 많이 없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거나 기억에 남는 일들도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또, 뇌의 신경세포 전달 속도 역시 나이가 들수록 느려집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파민 분비가 감소하고, 시간 지각에서도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모든 장면이 카메라로 찍혀 저장되었다면, 나이가 들어서는 몇 장면씩만 듬성듬성 찍히기 때문에 놓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눈 깜빡할 새 지나간 것 같은 것이죠.
혹시 여러분도 올 한해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즐거운 일이 많이 없었다고 느끼시면서, 그런데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것 같은지 의아해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하루를 만들 수 있는 일, 색다른 장소에서 낯선 경험을 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매일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리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던 어린 시절처럼, 일상에서 작은 모험을 감행하며 매일이 조금 더 특별하게 기억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