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최강록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러분은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있으신가요? 꼭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아니더라도 작가나 시인, 영화감독, 미술작가, 요즘은 유튜버 중에도 많은 팬을 보유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런 팬심은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나훈아, 남진,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마이클 잭슨처럼 이제는 전설처럼 남은 이들의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다만 그 표현 양상이 시대 변화나 문화 흐름에 따라 바뀌어 갈 뿐이겠죠.
이처럼 특정 분야나 대상을 깊이 파고드는 것을 일컬어 ‘덕질’이라고 합니다.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를 줄인 ‘덕후’에 반복되는 행위를 뜻하는 접미사 ‘–질’을 붙인 것이죠. 이와 함께 ‘팬덤’이라는 용어도 많이 사용하는데요. 이는 광신자를 의미하는 영어 ‘fanatic’의 fan과 나라를 뜻하는 ‘dom’을 합성한 말입니다. 팬덤은 주로 특정 유명인이나 예술가, 팀을 응원하는 팬의 집단을 지칭합니다.
예전에는 흔히 덕질이나 팬덤이라고 하면 젊은 사람들만의 이야기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트로트의 인기와 함께 트로트 가수들 역시 K-POP 아이돌 못지않은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팬덤은 다양한 연령과 성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 야구나 축구 같은 운동 종목에서도 특정 팀이나 선수들의 팬덤 역시 상당히 두터워 지고 강력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제는 덕질이나 팬덤이 일부 젊은 세대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덕질을 하거나 팬덤에 소속되는 심리에 관한 연구와 분석들도 늘고 있는데요. 전문가들은 덕질이나 팬덤을 하게 되는 이유, 또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심리적 이점에 주목합니다. 덕질이나 팬덤에 몰두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해당 대상과의 정서적 연결감에 있습니다.
비록 그 대상과 현실에서 일대일, 면대면의 관계를 맺지는 못하더라도, 미디어 또는 특정 공간이나 상황에서 마주하는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마치 실제로 아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듯한 친밀감과 상호작용의 느낌, 즉 ‘의사사회작용(parasocial interaction)’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해당 대상과 정서적 연결감을 느끼면서 동일시하기도 하고, 동경이나 선망, 때로는 이성적인 애정을 느끼며 그가 잘 되고, 성공하기를 응원합니다. 마치 우리가 좋아하는 스포츠팀이 승리하기를 바라고, 팀이 연패 슬럼프에 빠지면 내가 실패한 것처럼 한마음으로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해당 대상이 성공하면 마치 내가 성공한 것 같은 대리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느끼고, 내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합니다. 이를 통해 자아실현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 같은 대상을 덕질하는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팬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집단으로서의 새로운 사회적 정체감을 형성합니다. 그 안에서 느끼는 연대감과 동질감은 소속감의 욕구를 채워주는 기능을 합니다. 팬 커뮤니티에 대한 충성도나 동일시가 높을수록,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체감의 비중이 클수록 참여도 더 열심히 하게 됩니다.
덕질에는 물론 이런 순기능뿐만 아니라 부작용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서 집착이 되거나, 때로는 경쟁자로 생각되는 다른 대상을 비방하기도 하고, 타 팬덤과의 갈등이나 충돌을 빚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이런 부정적 양상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개인과 집단 차원에서 늘 주의를 기울이고 성숙한 덕질, 팬덤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부분과 관련해서 최근에는 팬덤 커뮤니티에서 건전한 팬덤 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응원하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는 것처럼 사회에 기여하고,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가기 위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또, 팬덤 활동을 하는 이들의 사연 중에는 삶의 아픔과 어려움, 힘든 마음을 좋아하는 대상과 그의 활동(음악, 미술, 운동 등)을 통해 위로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매일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그와 함께하며 힘과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죠. 또, 뒤늦게 덕질이나 팬덤 활동을 시작하며 삶의 활력을 찾았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덕질과 팬덤이 무료하고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운 변화와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죠.
아마 이런 점들로 인해 그토록 많은 이가 덕질과 팬덤에 몰두하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며 응원하는 마음, 그의 성장과 성공을 내 것처럼 기뻐하는 마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마음이 토닥여지고 위로받는 경험, 다른 팬들과의 교류를 통해 느끼는 소속감이 우리 삶의 또 다른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도 덕질이나 팬덤을 열심히 하고 계시는 분이 있나요? 그렇다면 ‘왜 저 나이 먹고 저런 걸 할까?’라고 생각하거나 “너 언제쯤 그거 그만할래?”하고 핀잔을 주기보다는 응원해주시면 어떨까요? 혹시 모르죠. 나 역시 언젠가 덕질이나 팬덤을 열심히 하게 될지도요.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고 응원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인생의 행복이 하나 더 생기는 것 아닐까요?
사당숲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최강록 원장
(전)의료법인 삼정의료재단 삼정병원 대표원장
한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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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경험까지 알려주셔서 더 와닿아요.!"
"조언 자유를 느꼈어요. 실제로 적용해볼게요"
"늘 따뜻하게 사람을 감싸주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