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전형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여러분은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에서 살아왔으며, 앞으로 어디에서 살고 싶으신가요? 아마 많은 분이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니 당연히 한국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을 편하고 익숙하게 생각하며, 평생 그곳에서 살아가리라 여깁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좀 바꿔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지금 살고 계신 곳은 어디인가요? 앞으로 살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요? 아마 조금 더 다양한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구, 광주, 부산, 대전 등 다양한 곳에서 태어나신 분들이 현재는 서울, 울산, 목포, 경주처럼 고향과는 다른 곳에서 사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또, 고향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지금, 앞으로 또 다른 곳으로 이주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실 수도 있겠죠.
한국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로 이주한 경우든, 혹은 더 멀리 한국을 떠나 다른 해외의 도시로 이주하거나 잠시 외국생활을 하는 경우든, 반대로 해외에서 태어나 지금 한국에서 사는 경우든, 나고 자란 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적응하며 정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느낍니다.
같은 한국이라도 지역마다 언어나 정서, 표현방식, 음식에서 차이가 나기도 하고, 한국이 아닌 외국이라면 피부로 와닿는 차이가 더욱 크겠지요. 이런 이주 경험은 나이가 어린 성장기에 경험할수록 정체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또, 아동기나 청소년기가 아닌 성인기에 이주하며 새로운 장소와 문화에 경험할 때 역시 정체감의 변화나 혼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주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접촉,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독특한 정체감 형성 과정을 겪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제3문화 아이들(Third Culture Kids: TCK)’이라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는 부모를 따라 해외로 이주해 외국 생활을 한 미국 아동들을 뜻하는 말로 문화인류학자 루스 유심(Ruth Useem)이 1950년대에 처음 사용했습니다.
제3문화 아이들은 아직 정체감이 형성되는 과정인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부모님의 출생국이나 문화, 즉 모국이라고 할 수 있는 제 1문화를 떠나 제2 문화에 해당하는 해외 생활을 경험하고, 이 두 가지 모두를 받아들여 제3의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이들을 뜻합니다. Kids라는 단어가 이야기하듯 일반적으로는 아동기에 이런 경험을 한 이들을 말하지만, 성인이 된 후 이주하고 다양한 문화권을 경험하면서 정체감의 혼란이나 재정의를 경험한 사람들까지 포함하기도 하며, 이들을 성인 제3문화 아이들(Adult Third Culture Kids: ATCK)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국내에서는 부모님의 직업이나 이사로 인해 새로운 지역과 문화에 적응하게 되는 경우, 국제결혼의 증가와 함께 다문화가정의 자녀로서 한국 문화와 부모님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하며 성장하는 경우, 외국인 부모님의 자녀로서 부모님이 한국으로 이주하며 자연스럽게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접하게 된 경우, 부모님이 모두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국제학교에 다니며 다른 언어와 문화를 접하게 되는 경우 등이 제3문화 아이들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와 관련해서는 부모님의 국제결혼, 사업이나 선교 등의 목적으로 인해 해외에 살지만 여전히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접하는 경우, 교포 1.5세 또는 2세 및 그 이후 세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제3문화 아이들은 두 가지 이상의 문화를 접하며 폭넓은 세계관을 갖고 이중언어 혹은 다중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이 이점으로 꼽힙니다. 또, 문화적 감수성이 높고, 새로운 곳에 대한 적응력이 높으며,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며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사고와 높은 문화 지능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충돌로 인한 가치관과 정체감의 혼란, 친밀한 관계를 맺기 전 다른 나라나 문화로 이동하는 경험이 반복될 때 오는 친밀감의 부재, 관계적 어려움, 서로 다른 문화 중 어느 한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소속감과 안정감의 부족 같은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제1문화를 부정하거나 제2 혹은 제3문화에 온전히 동화되고자 하기도 합니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흑인이지만 백인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에 동화된 사람을 겉은 까맣지만 속은 하얀 크림으로 채워진 쿠키에 빗대어 ‘오레오’라고 부릅니다. 유사하게 동양인이지만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백인에 완전히 동화되고자 하는 이들은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라고 불립니다. 오레오와 바나나는 그 자체로는 좋은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겠지만,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며 정체감에 혼란을 느끼거나 새로운 정체감으로 탈바꿈하며 그 사회에 동화되고자 하는 이민자들의 심리를 잘 보여줍니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은 개인적 정체감(individual identity)과 함께 심리사회적 정체감(psychosocial identity)을 정체감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집단 안에서도 고유하고 특별한 존재로서의 자신에 관한 개인적 정체감과 함께 개인이 속한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의미하는 심리사회적 정체감이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내가 속한 지역, 사회, 민족, 국가, 문화와 같은 요인들 속에서 자신을 어디에 가깝다고 볼 것인지, 어디에 속한 사람으로 간주할 것인지가 심리사회적 정체감 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에릭슨에 의하면 정체감의 형성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완결되고 그 후에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제3문화 아이들의 경우 다양한 문화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나 통합되지 않는 경험으로 인해 현재 정체감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더라도, 다른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창의적인 시각을 형성하면서 정체감의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변에서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해하고 지지와 격려를 보내준다면 이들이 겪는 불안, 차별감과 소외감, 뿌리가 없는 느낌을 해소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제3문화 아이들이 나와는 거리가 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느끼시는 분들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3문화 아이들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직장 동료, 학교 선후배가 있을 수도 있고, 자녀가 학교에서 다문화가정 자녀와 학급 친구로 만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여러분이 국내 또는 해외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럴 때 새로운 지역과 낯선 문화를 경험하며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신념체계나 행동양식이 더 이상 적응적이지 않거나 새로운 곳에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제3문화 아이들의 경험이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이렇게 우리 모두가 삶의 어느 시점에 언젠가 제3문화 아이들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작은 도움과 이해를 필요로 할지 모를 제3문화 아이들을 향해 더 열린 마음과 따뜻한 자세로 다가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신림평온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 전형진 원장
국립공주병원 전공의 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